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생명지킴이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억울한 유족들의 아픔을 보듬는 이들은 누구인가? 천주교 주교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고 평범한 서민들이다. 교회는 인간존엄성과 생명윤리의 파수꾼인양 자부했지만 세월호 참사를 통해 그 위상은 허상이 되어 버렸다. 불의한 정권의 무능과 부패가 빚어낸 비극적인 대형 학살임에도 불구하고 강우일 주교를 비롯한 극소수의 성직자만이 관심을 가질 뿐 가톨릭교회 주요 언론과 구성원 대부분은 무관심으로 외면 일색이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일제 강점기에도 주교들은 그렇게 하였다. 신도들이 독립운동 단체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일을 철저히 금지시켰고 독립 활동을 한 신도들은 가차 없이 쫓겨났다.
한신대학교 종교학과 신광철 교수가 쓴 ‘일제 강점기 한국천주교회와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 논문(1998년)은 교도권의 친일 행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919년에 대구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에는 천주교 재단 해성학교 교사인 김하정이 있었다. 대구 지역의 3.1 만세 운동은 김찬수(벨라도)의 집 사랑에서 독립선언서 등 유인물이 제작되었다.
또한 3월 8일의 만세운동에서는 해성학교 학생들이 많이 체포되었으며, 명도회(천주교 평신도단체)의 젊은 회원들도 다수 체포되었다고 한다. 교사 홍순일은 대구 신학교와 사회단체의 연락책이었는데, 홍순일은 이 일로 인해 해성학교에서 파직을 당했다. (윤광선, 「삼일 운동과 대구 신자들」, 『교회와 역사』 103)
대구 지역의 만세운동에 평신도들이 다수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하정 같은 인물은 만세 운동 지역 책임자로 활동했던 점도 확인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천주교 선교사들(주교와 신부들)은 매우 강압적인 방법으로 만세 운동을 저지하였다. 민족 현실 인식과 민족 운동에 대한 입장에 있어 교권과 교도의 거리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것이었다. 3·1 만세 독립 운동 사건 3년 후인 1922년 9월 21일자로 뮈텔주교는 《서울 대목구 지도서》라는 제목으로 성직자 사목 지침서를 공표하였다.
뮈텔 주교는 특별히 다섯 가지 사항을 강조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항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국가 당국(일제 총독부)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도록 신자들을 가르칠 책임이 사목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사목자들은 신자들에게 일본의 한국 점령이라는 현실을 잘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신자들이 독립운동의 정신에 물들어 이런 단체에 가입하지 않도록 지도 감독하라는 방침을 세웠다.
세 번째 사항도 성직자들은 일본에 의한 한국 합병을 인정하여 정치적 중립을 잘 지킬 것을 요청하였다. 《서울 대목구 지도서》는 1924년 이후에 한국교회 전체에 걸친 신앙 규범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구 교구에서도 《대구 대목구 지도서》를 공표하였는데, 제 32조에서는 성직자들은 일본 국경일에 해당 지역의 저명인사나 그에 버금가는 당국자들(총독, 군수, 경찰서장)을 개인적으로 방문하거나 적어도 카드를 보내라고 명시하였다.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는 호교론자들의 주장은 허구였다.
교회는 일제 강점기동안 독립운동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어 억압받는 민족의 일치와 육화를 전면 거부하였다. 교회 지도부의 목적과 활동은 일본 총독부와의 우호적인 관계, 일제로부터 교회의 보호, 신자 수 늘리기, 성전 건립이 중심 사목활동이었다. 식민지 민족의 현실에는 눈과 귀를 막았던 교회였다.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는 어린 처녀들(위안부)의 울부짖음은 교회의 일이 아니었다.
한국 청년들이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강제 징집되어 끌려갈 때, 교회는 일본의 성전(聖戰)에 참전하여 순교자의 꽃을 피우라고 촉구하였다. 역사와 민족 앞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반민족, 반생명, 반평화적 행태는 아직도 변함없이 계승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특히 지난 용산 참사,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 건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친일권력에 대한 부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를 척살했을 때, 뮈텔 주교는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토오의 죽음은 공공의 불행이다”, “증오를 일으켜야 할 사건이다”라고 비난하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기쁜 소식으로 반기고,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뮈텔 주교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주교는 “이토오 히로부미가 한국에서 많은 공적으로 쌓았으며,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한국인들은 그 은혜를 모르고 있다”(뮈텔주교 일기, 1909년 10월 26일자)
1909년 10월 28일에 동경 대교구의 뮈가브르 주교가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낸다. 전보 내용은 “일본의 유력 신문이 이토오의 암살자가 천주교 신자라고 함, 사실 여부 속답 바람. 요코하마 천주교 뮈가브르” 뮈텔 주교는 그날로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는 내용의 답전을 데예 신부를 통해 보냈다.
과연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몰랐을까? 안중근은 황해도의 이름난 평신도 선교사였고, 뮈텔 주교가 대학 설립 문제로 안중근을 만난 적이 있으며, 안중근의 성공적인 선교활동은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어 심지어 교구장 비서 신부가 안중근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안중근을 모른다고 부인하니 얼마나 이토오 히로부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는지 알 수 있다.
뤼순 일본 재판장은 뮈텔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 토마스에게 종부성사를 위해 신부를 파견해달라고 청원한다. 뮈텔은 이를 거절할 뿐 아니라 전국의 성직자들에게 누구도 가서는 안 된다는 공문을 보낸다. 그러나 빌렘(홍석구) 신부는 안중근의 마지막 성사를 위해 뤼순 감옥으로 향했다.
일본 재판부조차 관용을 베풀어 안중근의 마지막 성사를 허락해주었지만 소위 신앙의 목자라는 주교는 민족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사형수가 된 안중근의 마지막 소원마저 차갑게 거절하였다. 이것이 일제 치하 한국 천주교회의 생 얼굴이었다.
한국천주교회 내에서 안중근은 사후 80년간 ‘암살범’, ‘살인자’로 매도되면서 낙인찍혔지만, 오히려 교회 밖과 중국과 해외에서는 애국지사로, 의사로, 평화사상가로 올바른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 들어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안중근 재평가를 시도하면서, 뒤이어 1990년대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의 신앙과 행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안중근 추모 운동이 교회 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후에도 무려 40년 동안 천주교회는 안중근에게 암살범의 굴레를 씌우고 있었으니 교회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은 매우 부족했음을 고백해야 한다. 한없이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민족을 사랑한 것이 죄란 말인가? 수탈당하고 울부짖는 식민지 백성의 고난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신앙인 안중근의 몸부림과 자기희생이 교회에 어떤 누를 끼쳤단 말인가?
민족의 침략자 이토오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수녀 셋을 데리고 추도식에 달려간 뮈텔주교의 행위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이었는가? 한국 땅에 선교사명을 수행하면서 억압받는 약소국 국민들의 입장을 한번이라도 고민해보았다면 과연 안중근을 매정하게 내팽개쳤을 수 있을까? 이토오 히로부미의 죽음을 극진히 추모하고 애도하면서도 어떻게 자신의 어린양은 돌보지 않았을까?
세월호 학살에 대한 무관심과 사회적 약자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는 교회를 보면서 뮈텔 주교의 《서울 대목구 지도서》가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가 14살 된 미국 학생에게 교황이 미국에서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가? 학생은 “미국인들을 계몽시켰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작년에 방한하신 교황님의 메시지를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