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떤 분일까? 그를 알기 위해선 신약성서, 그 중에서도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의 복음서를 들춰봐야 한다. 연대기 순으로 보면 마르코 복음이 가장 먼저 나왔다. 그러나 사복음서의 시작은 마태오 복음이다. 왜일까?
평신도 신학자인 김근수 현 <가톨릭프레스> 발행인의 책 『행동하는 예수』는 이 같은 물음에 명쾌한 답을 제시해준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마태오 복음 해설서다. 이 책은 본문만 790쪽이 넘지만, 지난 해 3월 초판 이후 현재 5쇄가 나왔다.
이 책은 단순한 복음 해설서로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해방신학자가 풀어낸 마태오 복음이다. 해방신학의 큰 주제는 ‘가난’, 더 자세히 말하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해방신학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통해 천착했던 주제였다. 특히 마태오 복음은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긴 장면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해방신학은 단지 ‘가난’을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내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가난을 무기로 활용했다. 가난을 명분으로 앞세워 부자들의 헌금을 노렸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 깃발 아래 돈, 사람, 박수갈채가 모인다. 마더 테레사, 이태석 신부 같은 경우다. 부자들은 돈을 기부하면서 죄책감을 크게 덜 수 있다. 사회개혁과 교회개혁에 거리를 두는 성직자들은 이 흐름에 기꺼이 합류한다. 교회 안에서 칭송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예수’ 289쪽)
사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가톨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개신교 교회의 빈민구제 활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기여하는 부분은 복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호사업이다. 구호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선 부자들의 선의에 기댈 수밖엔 없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 빈민구제 사역에서도 가난 보다 선교가 더 먼저다. 복지혜택을 누리기 위해 ‘새신자 카드’라는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엔 돈이 넘쳐나는데, 인근 빈민가에 사는 주민들은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교회가 입구에 톨게이트를 만들고 통행권을 발부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보다 ‘가난한 교회’
저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아닌 ‘가난한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주장이 훈계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교회가 가난해지지 않으면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실 이런 경고는 가톨릭 보다 개신교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통계청이 10년마다 실시해 발표하는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라. 지난 2005년 조사결과 개신교 인구는 1995년 대비 1.4%(14만 4,000여명)이 감소했다. 2015년 조사는 지난 11월15일(일) 마감돼 발표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계는 이번 결과가 2005년 대비 더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하는 눈치다. 개신교 교세가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돈과 권력에 눈멀어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반면 가톨릭은 표정관리에 여념이 없다. 신자와 돈이 몰려들고 있어서다. 저자는 안이한 가톨릭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가난한 교회가 되려면 우선 교회의 재산을 줄여야 한다. 불편하더라도 성당과 교회 신축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신자들에게 돈을 걷는 방식과 규모를 반성해야 한다. (중략)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내세우면서 ‘가난한 교회’를 외면하는 길을 걷지 않을까 걱정된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신자수가 늘고 돈이 풍부해지면서 이미 그런 길로 들어선 것 같다. 돈 문제로 인해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 한국 개신교는 점차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 같아 안타깝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모두 돈 문제로 인해 추락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행동하는 예수’ 289~290쪽)
이 대목에서 살짝 샛길로 빠지고자 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로 인해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가톨릭은 어떤지 모르겠다. 개신교계에서는 정부 입장에 찬성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복음서는 네 개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등 사복음서 저자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예수의 행적을 재구성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아우르는 그리스도교 테두리 바깥에 있는 분들은 예외로 하자. 적어도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목회자, 사제, 신학자, 평신도들은 국정화 찬반 논의에 앞서 왜 사복음서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저자들의 시선이 어떻게 다르고, 왜 다른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만약 그러고도 국정화를 찬성한다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먼저 이들을 잘 타이르고 그래도 생각을 바꾸지 않거든 얼른 울타리 밖으로 내쫓아야 할 것이다.
“같은 사건과 이야기를 두고서 복음서 저자들의 표현이 서로 다른 것을 독자들은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까. 예수 드라마는 카메라 기사의 촬영 각도와 의도에 따라 화면이 다르게 나타난다. 더구나 촬영자는 예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예수 생전이 아니라 부활 이후에 촬영된 것이다. 예수에 대한 사색과 공동체의 사정이 촬영에 이미 반영되었다. 성서는 객관적 보도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해석된 신앙고백이다.” (‘행동하는 예수’ 409쪽)
이 책을 해설서라고 했지만, 해설서라기보다 교회 비판서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저자는 해방신학자의 관점에서 마태오 복음을 해설했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시각을 선험적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보다 복음서 본문에 사용된 낱말 하나하나의 의미와 역사적 맥락을 면밀히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유다교와 가톨릭, 개신교의 관점 모두를 빠짐없이 소개한다. 따라서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무관하게 어느 독자라도 이 책을 읽으면 마태오 복음서가 가진 고갱이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다. 신학자로서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태오 복음이 우리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먼저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먼저 찾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은 것이 아니라 이들이 사는 현장을 찾아가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주고, 복된 소식을 전파했다. 책 제목 대로 ‘행동하는 예수’였던 것이다.
또 하나, 마태오 복음서는 현재 교회에서 이뤄지는 가르침이 복음의 원래 메시지와 거리가 멀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 책 『행동하는 예수』에 적힌 복음 해설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다 보면 현재 교회의 가르침이 복음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드러난다. 복음서와 현실의 괴리감은 경악스러울 정도다. 복음 정신의 훼손은 비단 가톨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개신교가 종교개혁 전통에 힘입어 신학적 우위를 주장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가톨릭을 폄하한다고 개신교가 빛나지 않는다. 개신교 역시 교권주의와 물신주의에 물들어 있고, 이는 성서 정신 왜곡에서 비롯됐다. 가톨릭이고 개신교 할 것 없이 복음 정신을 교회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변질시킨데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앞서 이 책을 교회 비판서라고 정의한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예수를 알고, 그를 따르기 위한 방법은 특별하지 않다. 사복음서, 특히 ‘가난한 사람’을 섬긴 예수의 행적이 세세히 기록된 마태오 복음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자. 그리고 가난을 실천하자. 천국의 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열리니까 말이다.
※ 이 기사는 베리타스에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