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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 (스콧 라이트)
  • 편집국
  • 등록 2015-12-21 16:17:51
  • 수정 2015-12-21 16: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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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주자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왜 가난한지 묻자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죽음으로 라틴아메리카를 구원한 기적 같은 이야기!

가장 낮은 이들의 대변자 로메로 대주교 평전



▲ 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 / 스콧 라이트 / 336쪽



작품 소개


라틴아메리카 교회 역사는 로메로 대주교 피살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_구스타보 구티에레스   

가난한 자들 편에서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다 미사 도중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엘살바도르 대주교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이다. 로메로의 유년기와 사제가 된 과정,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직자로서 살았던 25년, 친구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죽음을 계기로 가장 낮은 이들의 아픔에 눈 뜨고 그들의 편에 서기까지, 주교가 되어 처음으로 서품한 신부의 죽음과 정권의 총칼에 의해 민중들이 학살될 때 “불의한 명령이 아닌 양심에 따르라”고 호소하던 모습,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압박 속에서 지켜낸 신념, 그리고 죽음……. 오스카 로메로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교회가 있어야 할 영광의 장소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 숨 가쁜 삶의 여정이 저자 스콧 라이트의 세밀하고도 명징한 문체로 펼쳐진다. 로메로의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야기들이 담겨 더욱 반갑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로메로 대주교의 생애는 오늘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진정한 성인의 면모를 제시할 것이다.


행동하는 사제 오스카 로메로. 

그에 의해 세상이 바뀔 수 있음을 깨달은 우리 모두를 위한 선물 같은 책. _팍스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1980년 3월 24일, 남미 엘살바도르의 한 병원에 위치한 성당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다. 네 명의 괴한에 의한 암살사건. 당시 성당 내에서는 수녀와 환자들 앞에서 오스카 로메로 엘살바도르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 중이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종교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조국의 정권에 저항했다. 무엇이 보수적인 성직자를 20세기 성인의 반열로까지 이끌었을까? 당시 엘살바도르는 50년 가까이 지속된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정부와 관료는 부패하였으며, 전 국토의 60%를 일부 지주 가문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노동자, 소작농, 학생, 교사들은 단체를 조직하여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하였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 속에 1980년 한 해에만 무려 1만 2000명 이상이 살해당했고, 로메로 대주교 역시 이때 살해당했다.


이 책은 오스카 로메로의 저항과 순교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 또한 본래는 보수적인 성직자였다.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엘살바도르로 돌아와 산 미겔 교구 비서 사제로,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총장 등 엘리트 사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로메로가 정해진 길 위에서 현실의 삶으로부터 눈 돌린 사이 엘살바도르는 극심한 변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 이어진 군부독재에 의해 극빈층과 부유층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억압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좌파 정당들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해방운동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지주들과 결탁한 군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과 통제를 강화했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몰리나는 1972년 7월 1일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산살바도르에서는 민주화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 주교회의는 주교회의 사무총장 로메로 주교의 승인 하에 정부의 폭력 진압을 지지한다. 대학은 정권 전복을 꾀하는 집단이며 정부는 국가를 위협하는 행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친구의 죽음으로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다


1977년 2월 23일 로메로는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취임한다. 정부와 부유층 신자들의 그의 교구장 취임을 적극 환영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상류층의 환영은 3주를 채 넘기지 못한다. 로메로의 대주교 취임 후 3월 12일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살해당한 것이다. 그는 로메로 대주교의 친구로서 농촌에서 가난한 농부들을 위해 일하면서 그들과 같이 살았다. 이 사건 이후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서 살기 시작한다. 친구의 죽음 이후 로메로 대주교의 많은 것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그리고 3년 동안, 그는 불꽃 같은 생을 살았다. 로메로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해 “불의한 명령이 아닌, 양심에 따르시오”라고 일침했으며,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역사가 요구하는 생명을 건 모험을 피하지 말자”라고 호소하는 등 비폭력투쟁으로 저항했다. 그럴수록 죽음의 위협 또한 커져갔다. 그리고 끝내, 1980년 3월 24일 프로비덴시아 병원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에게 암살당했다. 민중을 위한 삶이 민중을 위한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20세기의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


오스카 로메로의 삶은 여러 면에서 예수의 삶과 닮았다. 보잘것없는 나라의 작은 시골,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두 사람 모두 목수가 되는 훈련을 받았으며,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섰다는 점. 그리고 불평등과 부패를 강하게 비판하다 사회지배층으로부터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로 고발당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은 로메로 대주교를 예수에 비교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행동하는 그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강력히 거론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성인 추대는 그가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점에서 지지부진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자마자 시성 절차가 재개되었다. 2015년 2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함에 따라 시복시성에 가속도가 붙었고, 마침내 동년 5월 23일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처럼 스스로 가난했으며 가난한 이들 편에 서고자 한 교황 프란치스코는 오스카 로메로의 삶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하느님의 종이었으며, 지금도 계속 순교 중입니다.” 



저자 소개


스콧 라이트 (Scott Wright)

로메로 대주교를 평생 딱 한 번 직접 만났다. 1979년 피난민 수용소에서 일하는 동안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로메로 대주교를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현실성 있게 담아내려고 애썼다. 담백하고 간결한 필체와 사진으로 대중을 위한 평전을 쓰게 되었다. 공저 『오스카 로메로, 삶과 사상』이 있다. 지금도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역자


김 근 수 (가톨릭 프레스 편집인 / 해방신학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 독일 마인츠대학교에 유학하여 8년간 신약성서를 공부하였다. 로메로의 땅 남미 엘살바도르에 있는 UCA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소브리노의 유일한 아시아인 제자다. 해방신학의 눈으로 역사의 예수를 계속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슬픈 예수』 『행동하는 예수』 『교황과 나』, 공저로 『교황과 98시간』, 옮긴 책으로 『해방자 예수』가 있다.



본문 발췌


그러나 로메로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자선 관계를 정의와 기회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도 했다.

“빈센트 드 폴 성인처럼 로메로 신부님을 따르는 가난한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물론 신부님은 부유한 사람들이 자선기금과 구호품을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눈다고 생각하셨지요. 하지만 이는 일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는 동시에 부유한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 p.64~65


로마가 새 대주교를 임명하기 위해 1976년부터 다양한 단체들과 의논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차베스 대주교가 이제 곧 은퇴할 나이가 되기 때문이었죠. 교황 대사는 로메로 주교를 후보자로 추천하고 정부, 군부, 사업가 그리고 사교계 여성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에게 물었고 부자들은 로메로를 전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부자들은 로메로를 ‘자기들 중 하나’라고 믿었습니다. ― p.112


11월 24일 정부는 공공질서 유지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정부는 금지된 행위에 참여했다고 ‘추측’되거나 ‘참여할 조짐’이 있는 사람도 용의자로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정부가 원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고문하고 추방시킬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로메로는 주일 강론에서 법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나는 법률 전문가는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에 근거를 둔 종교적 관점에서 이 나라에 일어난 일들을 바로잡을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법에 대한 가르침으로 강론을 이어갔다. “진정한 법은 정의로워야 하며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또한 적법한 권리를 가진 주체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을 인용했다. “정의롭지 않은 법은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p.156~157


가난은 엘살바도르에 만연된 제도적 폭력으로, 빈곤층과 부유층의 격차를 벌리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토지와 재산이 소수에게 집중되어 부유층은 혜택을 받았으나 빈곤층은 계속해서 착취당하고 가난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빈곤의 폭력은 빈곤층과 부유층 사이에서 2차 폭력을 일으켰다. 부자들은 토지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대와 경찰을 이용해 폭력을 행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권을 지키고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폭력을 분석하는 데 세 가지 접근법을 적용했다. 폭력의 종류를 구분하고 각 폭력에 대한 교회의 도덕적 판단 기준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엘살바도르의 특수한 상황에 맞추어 폭력을 분류하고 판단하여 교훈을 제시했다.

“라틴아메리카와 엘살바도르에서 자행되는 폭력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메데인에서 말한 ‘제도적 폭력’이라는 점이다. 제도적 폭력은 불평등한 현실의 결과로, 이 나라 대다수의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조차 빼앗긴다.

제도적 폭력과 함께 ‘억압적 폭력’이 행사된다. 이것은 다수의 열망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 권력기관이 사용하는 폭력으로, 앞에서 말한 불평등에 저항하는 행동에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이다.”

로메로는 제도적 폭력과 억압적 폭력을 비난했다. 그는 불법 대응 목록에 이 두 가지 폭력과 함께 ‘선동적이거나 테러리스트적인 폭력’과 ‘자발적 폭력’을 덧붙였다. 교회는 ‘정당방위 폭력’은 허용되나 ‘비폭력의 긍정적 역동성’을 더 선호한다는 의견도 나타냈다. ― p.176~178


사건 당일 늦게, 로메로 대주교는 슬픔에 잠긴 채 영안실에 도착했다. 군인들이 영안실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옥타비오 신부는 로메로가 주교가 된 후 처음으로 서품한 사제였다. 그런데 이제 그가 죽었다.


바닥에는 피가 커다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섯 구의 시신은 바닥에 그냥 던져져 있었습니다. 시신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공동체 사람들이 시신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옥타비오는 어디 있습니까?”

“대주교님, 여기입니다. 이 주검이 옥타비오 신부입니다.” 그들이 그를 가리켰습니다. 신부의 주검은 사람의 몸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주검은 아주 납작했습니다. 얼굴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처참히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께서는 땅에 무릎을 꿇으시고 충격으로 놀란 머리를 감싸셨습니다. 대주교께서는 옥타비오 신부를 누구보다 사랑하셨기에 끝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군인들이 탱크로 옥타비오를 밀고 지나가 머리를 뭉개버렸습니다…….”

경비병이 문틈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로메로는 사제복이 피로 흥건히 젖는 것도 아랑곳없이 옥타비오 신부의 주검을 안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옥타비오 신부, 내 아들……. 너는 임무를 완수했다. 너는 믿음직한 사제였다…….” ― p.195~196


“대주교님, 이러다 살해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 한 명이 로메로 대주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정부가 제안하는 경호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하시고, 최소한 다른 민중조직 지도자들이 하는 수준의 안전장치는 취하셔야 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일정을 다양하게 조정하셔야 합니다. 매번 같은 시간에 미사 강론을 하시면 안 됩니다. 강론 시간을 바꿔가면서 하십시오. 혼자서 운전하지 마시고요.”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작은 차를 손수 몰고 산살바도르 거리를 다녔다. 사람들이 “대주교님, 왜 혼자 운전하고 다니십니까?”라고 묻자 “저는 혼자 다니는 것이 편합니다. 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친다면, 그때 혼자였으면 합니다. 나만 당했으면 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다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 p.26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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