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가장 흔한 말이지만 가장 그리운 말이다. 설레이며 힘들게 표현해도, 사랑, 그 두 글자로 담아내지 못하는 그 무엇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그런 말이다. 사랑, 가장 흔하지만 가장 설레는 말, 어쩌면 우리 삶의 가장 신성한 말일지 모르겠다.
그의 울음을 남의 울음으로 둘 수 없다. 함께 울어야 한다. 그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둘 수 없다. 함께 아파야 한다. 기쁨도 마찬가지다. 울음도 아픔도 기쁨도 둘로 있을 수 없다. 하나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사랑, 그 이유만으로 말이다. 둘이 될 수 없다. 떨어질 수 없다. 떨어진다는 것이 아픔이다. 둘이 된다는 것이 아픔이다. 하나로 있어야하는 그 하나가 둘이 되는 아픔이다. 쪼개지는 아픔이다. 하나의 존재가 난도질 당하는 아픔이다. 연인의 이별을 생각해보자. 얼마나 아픈가. 몸의 눈은 보지 못하지만 맘의 눈은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다. 몸은 이렇게 여긴데, 맘은 그렇게 거기에 있다. 하나의 존재가 찢겨졌다. 사랑으로 하나 된 존재가 둘로 찢겨졌다. 하나로 있어야 할 몸과 맘이 둘로 찢겨졌다.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사랑이다. 하나로 있어야 한다.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이렇다. 연인의 사랑도 부모와 자식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둘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로 있어야 한다는 그 이유 하나다.
소록도의 두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을 떠올린다. 힘들고 아픈 영혼의 옆에서 벗이 되고 가족이 되려 했다. 하나가 되려 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하나로 있어야 하기에 하나로 있었다. 힘든 병으로 눈물 흘리는 이의 그 아픔이 남의 아픔이 아닌 자신의 아픔이라서, 남이 아는 자신의 아픔이라서, 그렇게 그들의 아픔마저 하나로 있어야 했기에 그렇게 있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수단의 이태석 신부님을 떠올린다. 가난과 내전, 그 깊은 상처의 벗이 되고 가족이 되려 했다. 하나가 되려 했다. 남으로 두지 않았다.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다. 오직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은 자신의 몸에 찾아온 그 깊은 아픔보다 그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다. 남의 아픔이 아니라,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의 아픔이었기에 자신보다 더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왔기에 그 아픔을 먼저 생각했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안트베르프의 하데비치(Hadewijch van Antwerpen)가 떠오른다. 그녀가 말한 ‘사랑의 신학’, ‘사랑의 존재론’이 떠오른다. 지금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13세기 귀족 가문 출신의 라틴어와 교부의 가르침을 익힌 여성이란 사실만이 최근 연구의 결실이다. 그런 연구의 결실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참 모습은 그녀의 작품이다.
그녀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을 살았다. 수도자도 아니고, 수도자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런 중세의 여인들을 베긴네(Begine)라 한다. 13세기 중세 여신도의 모임이다. 단순한 친목 단체가 아니다. 저마다 고유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질서 속에 있지 않았다. 승인된 어떤 수도단체에 속하지도 않았다. 역사란 비승비속의 삶을 살아간 이들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제도권 밖의 위험한 이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중세 영국의 주교이자 철학자인 ‘로베르투스 글로스테스테’는 이런 베긴네를 높이 평가했다. 스스로 결단하는 삶과 그 결단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높이 보았다. 베긴네의 삶은 가난했다. 그 가난이 당시 교회의 거대함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들은 자신의 신학으로 움직이는 신학자이고 철학자였다. 그 존재론적 사유의 깊이는 결코 당시 기득권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 베긴네 가운데 안트베르프의 하데비치가 있다.
그녀의 사상은 ‘사랑’ 두 글자로 집약된다. 사랑의 존재론이며 사랑의 신학이다. 그 사랑은 잠시 지나가는 찰나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하느님을 남으로 두지 않는 것,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 그것이다. 이 세상의 창조주인 하느님 가운데 우리의 참된 본모습이 있다. 그 모습 따라 우리가 만들어졌으니 우리 존재 가운데도 그 참된 본모습이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기에 하느님과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은 그 참된 모습에 충실함이다.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그 참된 본모습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우린 하느님 가운데 하느님과 둘이 아닌 하나로 있는 그 참된 본모습과 하나가 된다.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남이 아닌 하나가 된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한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실현될 때마다 우리는 찰나의 기쁨에서 벗어나 내일 새롭게 우리의 참된 본모습에 다가서게 된다. 그렇게 우리 자신에게 충실하게 되고, 더욱 더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간다. 참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채운다면 말이다.
이런 하데비치의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유일한 창조주 하느님 가운데 우리의 원형이 있다 했으니 말이다. 하데비치는 그 원형, 하느님 가운데 있는 그 참된 본모습이 우리의 이상향이라 한다. 아직도 그 이상향이 우리 삶에 완전히 구현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더 새롭게 실현될 우리의 본모습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열심히 그 이상향을 향하여 날마다 새롭게 살아가야 한다. 그 본모습이 새롭게 드러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온전히 하느님과 참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린 정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된다. 하나를 이루는 사랑이 완성되면서 말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변덕스런 이 세상의 가장 온전한 이상향은 초월된 곳에 있는 이데아라 했다. 그러니 그 이데아를 향한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사랑이다. 하지만 하데비치는 하느님 가운데 있는 그 참된 본모습이 이상향이라 했다. 그 이상향을 향한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며, 영원한 기쁨, 참된 행복으로 채워진 존재가 되게 하는 사랑이라 믿었다.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이라 믿었다.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 그리고 그 사랑이 남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이며 생명이고 사랑이 되게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사랑 때문이라 믿었다.
그러나 찰나의 기쁨에 빠져 영원한 기쁨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하느님 가운데 하나 됨으로 누리게 될 그 영원한 기쁨, 그 존재의 풍요로움을 보지 못하고, 감각이 주는 찰나의 기쁨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하느님과 우리의 존재가 하나가 되어 누려야할 그 영원한 기쁨이 아닌 찰나의 기쁨, 우리만의 기쁨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 버릴 때가 많다. 하데비치의 시를 읽어보자.
이 세상의 모든 것들.
나를 사로 잡기엔 너무나 작디 작은 이 모든 것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비해 너무나 위대합니다.
하느님의 그 무한함 가운데
나는 창조되지 않은 것에 이릅니다.
나는 그것에 다가가 만져 봅니다.
그것은 나를 이 세상의 어느 광대함 보다 더 광대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다른 모든 것은 나에게 그저 좁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잘 아십니다.
당신 또한 거기에 있으십니다.
<하데비치의 시 “모든 것들”>
찰나의 기쁨, 그 유한한 기쁨으로 채우기에 우리 존재는 위대하다. 하느님이 마련한 우리의 참된 본모습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찰나의 기쁨으로 채워지기엔 너무나 거대하다. 무한한 하느님 가운데 하느님과 둘이 아닌 하나로 존재하던 그 모습, 우리의 참된 본모습에 이른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광대하다. 그리고 그 광대함을 채울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에 약한 육체 가운데 있기에, 잠시 입에 달고, 잠시 눈에 보기 좋은 것에 빠져 산다. 그렇게 나만의 기쁨을 누리며 산다. 곧 사라질 그 변덕스러운 나만의 기쁨에 빠져 영원한 기쁨을 무시하며 산다. 하느님을 남으로 두고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 산다. 그러나 우리의 본모습이 아니다. 우리의 본모습, 하느님과 하나 된 우리 존재는 그 찰나에 담기기엔 너무나 광대하고 위대하다.
하데비치에게 하느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란 찰나의 기쁨을 뒤로 하고 참된 본모습으로 돌아감이다.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음이다. 찰나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정말 있어야 할 곳에 다가가 존재하려는 삶의 방식,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하데비치에겐 신앙이다.
하데비치의 또 다른 시를 읽어보자.
사랑의 광기여!
그 축복받은 운명이여!
만일 이를 알아차렸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나누어진 서로 다름도 하나이게 합니다.
진리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사랑의 광기는 쓰디 쓴 것도 달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의 광기는 낯선 이도 벗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의 광기는 작고 초라한 이도 높이 올려 자랑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데비치의 시 “사랑의 광기”>
참다운 사랑은 나 자신을 참된 나 자신으로 만든다. 그렇게 참된 본모습이 구현된 나는 다른 모든 존재들도 사랑하게 된다. 그 존재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봐야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참다운 사랑이다. 가난과 초라함을 부끄러운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가난의 아픔이 오롯이 자신의 아픔이 된다. 남의 아픔이 아닌 자신의 아픔이 된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게 된다.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아픔을 그리스도는 남의 아픔으로 두지 않았다. 그 아픔과 하나가 되었다. 둘로 두지 않았다. 철저하게 하나의 아픔으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했다. 그리스도는 그 사랑으로 이 모든 아픔을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아픔 앞에서 자신을 남으로 두지 않았다. 하데비치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모범이다. 원형이며, 참된 본모습이다. 자신의 기쁨을 위한 사랑이 아니다. 남의 아픔을 남의 것으로 두지 않는 사랑, 그 아픔을 위해 죽음의 고통도 이겨내는 사랑, 그 사랑을 온전한 것이라 믿는다.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데비치는 믿었다.
하느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하느님을 남으로 두지 않음이다. 하느님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는 사랑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하느님 가운데 나의 참된 본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렇게 하느님 가운데 나의 본모습이 지금의 나와 일치하는 그런 삶, 그 삶으로 하느님과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삶, 그런 삶이 참된 사랑이다.
그렇게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당연한 그리스도의 그 사랑, 하느님의 사랑도 남의 사랑이 아닌 나의 사랑이 된다. 가난하고 힘든 이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도 남의 사랑이 아닌 나의 사랑이 된다. 그런 하느님의 삶과 존재가 남의 삶과 존재가 아닌 나의 삶과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가난한 이를 향한 헌신과 봉사로 이어진다. 너무나 당연히 말이다. 하데비치는 참다운 신앙이란 가난한 이를 향한 봉사의 원동력이라 했다. 하느님을 향한 참된 사랑, 그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저 당연할 뿐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것, 그렇게 하느님의 존재를 이 땅에서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다. 하느님의 존재가 남의 존재가 아닌 나의 존재가 되어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 살아감이다. 이것이 하느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다.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본다. 내 작은 사랑이 부끄럽다. 이름과 몇 편의 작품을 남기고 사상사에서 사라진 안트베르프의 하데비치, 그녀의 사랑 앞에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