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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24
  • 김근수
  • 등록 2016-03-23 16:15:21
  • 수정 2016-03-23 16: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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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40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습니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도 스승만큼 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41 당신은 형제자매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까? 42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자매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 하겠습니까? 이 위선자여, 먼저 당신 눈에서 들보를 빼내시오.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자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습니다.

43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44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습니다. 45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루카 6,39-45) 



평지설교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락에서 루카는 여러 비유를 연속으로 소개한다. 소경의 비유(39), 제자와 스승의 관계(40), 눈 속의 티와 들보(41-42), 나무와 열매(43-44), 마음과 창고(45)가 등장한다. 두 소경, 제자와 스승, 두 형제, 두 나무, 두 사람 등 숫자 둘이 서로 비교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예수는 비유의 달인이다.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 말씀이 우선 보인다.(마태 15,14; 사도행전 20,30) 39절 소경이 소경의 길잡이가 되는 일은 당시 전혀 없던 일은 아니었다. 그리스 문인들 작품에도 비슷한 비유가 보인다. “남을 가르치면서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로마 2,21)와 연결되는 구절이다. 거꾸로 보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눈 밝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디모테오후서 2,2)


39절에서 루카는 소경으로 누구를 구체적으로 겨냥하고 있을까.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를 의식할 수 있겠다.(마태오 15,12-14; 로마서 2,19) 곧이어 나오는 루카 6,40을 생각하면, 소경은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아니면 평지설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중을 뜻할 수 있다. 39절 ‘구덩이’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떠올리는 소재로 이용되었다. (이사야 24,17-18; 예레미아 48,43-44)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는 40절은 예수의 가르치는 모습으로 안내한다.(루가 4,15; 5,3; 6,6) 40절은 예수의 제자들과 유다교 랍비의 제자들에게 공통으로 해당된다.(마태 10,24; 요한 13,16) 사회적 지위에서 제자들이 스승보다 높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의 가르침 내용은 스승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유다교에서 교육의 목표는 스승 랍비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가 언젠가 스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카는 거기까지 나간 것 같지 않다. 루카에게 제자들은 스승 예수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도 스승만큼 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말은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다. 죄인들에게 자비로웠던 예수를 주목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자비롭지 못한 사람은 아직 스승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기준이다’는 쉬르만의 언급은 적절하다.(H.Schuermann, Das Lukasevangelium. Bd 1, 369) 


41절의 ‘형제’라는 단어는 당시 언어 사용에 따르면 자매도 포함된다. 그래서 나는 형제를 형제자매로 옮겼다. 루카복음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이곳에 처음 나타난다.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일치된 마음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죄와 한계를 정직하게 보라는 말이다.(사도행전 1,15; 11,1; 15,3) 43절은 원인에서 결과를 상상하는 원리를 소개하고, 44절은 43절의 순서와 반대로 결과에서 시작하여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 


45절에서 창고(마태오 13,44; 콜로사이서 2,3) 마음(신명기 15,9;시편 44,22; 로마서 2,29)은 마태오 12,33-35 경우처럼 감추어진 가치를 상징하는 비유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는 45절 말씀은 조금 놀랍다. 입에서 발음된 단어와 실제 행동 사이에 커다란 차이와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루카 시대 사람들은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은 그의 행동으로 어느 정도 본색이 드러난다. “그들의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태오 7,16)


45절에서 행동보다 말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여기서 말과 행동을 대립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속과 겉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앞서 나온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에 대한 보충 소재로서 공동체에서 교리교육에 쓰려는 대목이다. 당시 공동체에 적지 않은 내부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서는 인간 사회의 갈등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교회 안의 갈등을 무시하지 않는다. 공동묘지의 고요함보다 야전병원과 오일시장의 시끄러운 소란이 우리네 삶에 더 가깝지 않은가. 


남을 평가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보라는 말은 남에 대한 비판을 묵살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초대교회에서 신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을 때 적용되던 해결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도행전 5,1-10; 고린토전서 5,1-5; 마태오 18,15-17)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려면 먼저 남의 눈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다. 서로 마주본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경험인가. 그러나 인간에게 거울도 필요하다. 거울이 없는 부자, 정치인, 종교인들이 많은 것 같다. 거울에 비친 사람과 친해져야 하겠지만 거울에 비친 그 사람을 정직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오늘 단락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우울하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이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제나 어둠속을 헤매는가. 누구 탓일까. 루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어둠 속을 빠져 나와 새로운 눈으로 빛을 보는 존재이다. (사도행전 26,17-18) 


소경이 소경의 길잡이라는 모순이 오늘도 많은 분야에서 진실인지 모르겠다. 우리 대부분 사실 소경 아닌가. 우리 대부분 소경 같은 지도자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는가. 백성이 소경인 경우는 드물지만, 지배층이 소경인 경우는 역사에 흔했다.  


먼저 당신 눈에서 들보를 빼내시오. 이 말은 언제나 타당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잘못 이용될 수 있다. 개인의 잘못에 집중하여 구조악을 외면하거나, 자기 잘못을 보느라 남의 큰 잘못을 보지 못할 수 있다. 내 죄뿐 아니라 남의 죄도 알아야 한다. 내 죄가 크더라도 반드시 사회악을 보아야 한다. 개인의 죄가 남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구조악이 개인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자기 죄를 바로 봅시다. 이 말을 종교마다 신자들에게 질리게 해댔다. 그러나 이 말도 필요하다. 사회악을 바로 봅시다. 부자와 권력자들의 죄를 똑바로 기억합시다. 왜? 부자와 권력자들의 죄는 가난한 사람들의 죄보다 훨씬 크고 교묘하기 때문이다. ‘내 탓이요’ 라는 말 좀 그만 하고 ‘남의 탓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악의 세력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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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sgmin302016-03-29 21:17:16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기준이다’는 쉬르만의 언급은 적절하다."
    오늘 가장 와닿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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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gmin302016-03-24 23:01:32

    드디어 다시 시작되었네요. 열심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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