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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25
  • 김근수
  • 등록 2016-03-29 09:50:59
  • 수정 2016-03-29 1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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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여러분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습니까?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습니다. 48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홍수가 나서 큰 물이 집으로 들이치더라도 그 집은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큰물이 들이치면 그 집은 곧 무너져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루카 6,46-49) 





루카 평지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이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격려하는 것으로 평지설교의 대단원이 마무리되고 있다. 평지설교에서 강조된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은 삶에서 행동으로 증거 되어야 한다.(야고보서 1,22-25) 행동 없는 믿음은(야고보서 2,14-26)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같은 편에 있다. 


46절은 인간의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될 수 있다는 현실을 전제한다. ‘주님’은 당시 개인 기도와 공동체 전례에서 자주 쓰이는 호칭이었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가리키는 단어였다.(보폰, Das Evangelium nach Lukas. 3/1 340) 


경청과 실천의 관계가 47절의 주제다. 실천의 전제는 경청이다. 경청은 실천에서 완성된다. 경청하는 만큼 실천할 수 있고 실천하는 그만큼 경청은 의미가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잘 듣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잘 듣는 것.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행동의 기본이다. 


47절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이미 루카가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루카 5,1;6,18) 이미 예수에게서 충분히 가르침을 들었으니, 이제 관건은 실천이다. 들은 것을 실천함은 자주 강조되었다.(신명기 5,28; 에제키엘 33,31-; 로마서 2,13) 


48절에서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집을 짓는 모습은 이스라엘 밖의 지역에 어울린다.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마태오복음 7,26 이하에서 ‘땅을 깊이 파고’라는 구절은 루카에서 삭제되었다. 49절에서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은 마태오 7,26에서 ‘모래 위에 집’으로 바뀌었다. 마태오는 집을 바위 위에 짓거나 모래 위에 짓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루카는 집을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짓거나 기초 없이 짓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마태오는 돌과 모래를 대조하고, 루카는 돌과 흙을 대조한다.  


마태오는 집을 다른 두 장소에서 짓는 모습으로, 루카는 집을 같은 장소에서 다른 두 방식으로 짓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마태오는 비, 홍수, 바람을 언급하지만(마태 7,26), 루카는 홍수만 말하고 있다. 마태오의 묘사가 이스라엘 지형과 기후에 좀 더 가깝다. 마태오는 이스라엘 지형을 잘 아는 것 같다. 루카는 이스라엘 지형에 익숙하지 않다. 루카복음의 주요 독자층이 이스라엘 밖에 살고 있었다는 반증의 하나다.


마태오는 홍수가 날 때 사막 지역에서 홍수 때에만 가끔 물이 잠겨있는 와디(건천)을 가리키고 있다. 루카는 마태오에서 묘사보다 더 큰 홍수를 생각하고 있다. 이스라엘 밖의 지역에서 발생하는 홍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48절에서 ‘홍수’는 종말론적 재앙을 나타내는 파괴적인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49절의 주제다. 축복과 저주, 계명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의 대조는 구약성서에서 자주 보인다.(레위 26,3-13; 신명기 28,1-14) 산상수훈도 긍정적인 사례부터 먼저 언급되듯이(루카 8,18; 13,9), 여기서도 긍정적인 비유가 먼저 언급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어떤 사건의 의미를 살필 때 거의 언제나 긍정적인 면을 우선 소개하고 있다.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을 유다인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오늘 단락은 유다인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의 청중, 복음서 독자,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주제다. 지금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듣고도 실천하지 않은 부류에 속할지도 모른다. 


초대 공동체에서 미사 이외에는 특별히 그리스도교적 표지가 따로 있지 않았다. 그래서 행동하는 믿음을 그리스도교의 특징으로서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행동하는 믿음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특징인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멀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서 10,9),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9)과 루카의 오늘 단락은 어느 정도 긴장 관계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목수 출신 예수는 주택 건축을 예로 들어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이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지은 탄탄한 집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듣고 실행하는 사람의 모범은 바로 예수였다. 예수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경청하고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편들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신세가 되었다. 공생활에서 예수가 선택한 삶의 자리가 곧 자발적 실업이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제자들과 방랑하는 예수는 일부러 가난한 처지를 선택한 것이다. 안락한 생활방식에 젖은 성직자들은 자발적 실업자 예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의 자리를 바꾸지 않고 생각의 자리만 바꾸는 것으로 회개에 충분할까.  


예수는 왜 자발적 실업자가 되었을까. 가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 겪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에 온전히 의지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편파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실업자 예수는 실업의 고통으로 고생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자그만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예수도 실업자였다. 실업자인 예수는 청년 실업자들과 고뇌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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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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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6-03-29 20:52:21

    행동 없는 믿음은(야고보서 2,14-26)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같은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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