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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26
  • 김근수
  • 등록 2016-04-05 10:34:39
  • 수정 2016-04-05 10:5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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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뒤에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2 마침 그 때 어떤 백인대장의 종이 중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이 대단히 아끼는 종이었다. 3 백인대장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유다인의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집에 오셔서 자기 종을 살려주십사 하고 간청하게 하였다. 4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와서 간곡히 부탁 드리기를 “그 백인대장은 도와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하였다.  

 6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셨다.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시켜 예수께 전갈을 보냈다. “주님, 수고롭게 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사람이 못 되며 7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8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9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감탄하시며 따라오는 군중을 돌아다 보시고 “잘 들어두시오.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10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은 이미 깨끗이 나아 있었다.(루카 7,1-10) 




평지설교가 끝나고 예수는 가파르나움으로 간다. 예수는 루카 4,42-44에서 가파르나움을 떠났었다. 가르침을 소개한 후 예수의 행동을 보도하는 부분이 이어지는 것이다. 백인대장이 주인공인지 그의 종이 주인공인지 독자들은 눈치 채기 쉽지 않다. 치유 기적보다 백인대장이 보낸 중재자들과 예수의 대화가 흥미롭다.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의 치유 이적에 중요한 요소인 치유 행동과 말씀이 모두 빠져 있다. 


‘백인대장’은 로마군대의 대규모 단위를 지휘하는 고위 장교를 가리키는 단어다. 이방인의 믿음이란 주제로 사건이 소개된다. 마르코복음엔 없지만 마태오, 루카, 요한에 공통으로 있는 이야기다. 가파르나움에 주둔하는 외국인 부대의 어느 장교와 그 부하 종이 등장한다.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복무하는 군인 같다.(루카 3,1; 요한 4,46)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로마군대는 공통년 44년부터 이스라엘에 주둔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였다. 예수 시대에 로마군대가 갈릴래아 지역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보폰, 3/1, 348)


같은 사건이 전해지는 마태오 8,5-13에서 예수는 로마군인을 직접 만나고 대화한다. 그러나 루카에서 예수와 로마군인은 만나지 않는다. 그 대신 유다인 원로들과 군인의 친구들을 통한 간접 대화가 이루어진다. 유다인 원로들이 로마군인을 예수에게 소개하고(4-5절), 군인은 친구들을 통해 자기 말을 예수에게 전하고 있다(6-8절). 두 번이나 사람들을 예수에게 보낸 로마군인의 간절함이 돋보인다.


3절에서 로마군인이 유다인 원로 몇 사람을 예수에게 보낸 사실은 그가 유다인 사회에서 누리는 지위와 호평을 암시한다. 4절과 5절에서 유다인 원로들이 로마군인을 칭송하는 말이 있다. 군인은 자기 종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고백하였다. 전달자를 통해 예수에게 기적을 요청하는 경우는 많았다.(마르코 5,22-; 요한 11,3; 사도행전 9,38) 치유를 부탁받은 예수 앞에서 치유를 간청하는 사람의 신분과 품위를 사람들이 칭송했던 경우는 없었다.


4절에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간곡히 부탁한 것은 이방인을 돕는 것이 예수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마르코 7,24-30) 회당을 지어준 이 로마군인은 또 다른 로마군인(사도행전 10,1-) 코르넬리우스를 닮았다. “그는 온 집안과 함께 하느님을 경외하며, 유다 백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고 늘 하느님께 기도하였다.”(사도행전 10,2)


6절에서 군인은 친구들을 시켜 예수에게 두 번째 전갈을 보냈다. 이방인인 그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이방인인 그는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으며(사도행전 10,28), 예수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겸손되게 멀리 있지만 도움을 간청하는 군인의 태도를 예수는 믿음(pistis)이라 불렀다. 


이방인 군인의 믿음에 감탄하는 예수의 모습은 마태오엔 없고 루카에만 나온다. 예수는 더구나 군중에게 군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죽어가는 환자를 치유하는 이적은 이방인 군인의 믿음에 대한 예수 말씀에 가려져 있다. 9절 예수의 말씀이 오늘 단락의 주제다. 이방인 군인의 믿음을 청중들과 루카복음 독자에게 모범으로 제시하고 이방인 선교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유다인 원로들은 병자 치유를 위해 이방인 군인을 예수에게 소개하지만, 예수는 이방인 군인을 유다인에게 믿음의 모범으로 거꾸로 소개하고 있다.(사도행전 10,45) 믿음에서 기적을 보는 사람도 있고, 기적에서 믿음을 보는 사람도 있다. 기적만 보고 믿음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7절에서 군인은 자기 종을 내 아이(pais mou)라 불렀다. 오직 루카에서 군인에 의해서 그 호칭이 쓰였다. 루카 7,2에서는 종(doulos)이, 요한복음 4,46에서는 아들(vios)이 사용되었다. 9절에서 믿음은 예수가 가져오는 구원을 신뢰함을 뜻한다. 10절에서 종은 예수의 치유 언어 없이 병이 나았다. 이것은 중풍병자에게 치유 언어를 사용한 사례와는 다르다.(루카 5,24) 9절에서 루카는 ‘한 번도’ 본 일이 없음을 강조했다면, 마태오 8,10에서는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음을 강조되었다. 마태오에서 예수 말씀이 이스라엘을 비판하던 느낌을 루카는 크게 줄였다.  


6,7절을 인용하여 영성체 직전 우리는 겸손하게 기도드린다.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루카 17,10) 우리 자신은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실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 죄를 사해 주도록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마땅히 요청한다. 


시리아와 갈릴래아에 살던 이방인중 일부가 유다교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중산층 또는 상류층에 속했다. 유다교의 하느님 사상과 윤리에 감동하여 회당을 방문하고 안식일과 유다교 축일을 존중하며 중요한 식사 율법을 지키곤 하였다. 할례를 받아 공식적으로 유다교에 개종하지는 않았던 이런 이방인들에게서 초대 교회는 많은 신자들을 얻었다. 루카복음 저자 자신이 이런 이방인 출신인 것 같다.(보폰, 3/1, 348) 회당에 재정적 도움을 주는 이방인들을 유다교는 특별히 고맙게 생각하였다.


오늘 단락에서 곤혹스런 질문이 생기겠다. 식민지 점령군 로마군대의 어느 장교가 피지배 백성 이스라엘 종교에 경제적 도움을 준다면, 그는 좋은 말을 들어야 하는가. 예수는 그 로마군인을 칭찬했지만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 군인의 종이 치유 받은 것이지 로마군대가 예수에게 혜택 받은 것은 아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어느 일본군 장교가 우리 종교 단체에 경제적 호의를 베푼다면, 5절처럼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라고 우리는 말해야 옳은가. 그 군인은 좋은 사람인가. 만일 그렇다면, 독재 정권이 종교에 주는 특혜를 종교는 감사해야 하는가.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는 사례 하나를 오늘 본문에서 목격하고 씁쓸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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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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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gmin302016-04-06 21:12:39

    가난한 예수 26회 잘 보았습니다.
    '믿음에서 기적을 보는 사람도 있고, 기적에서 믿음을 보는 사람도 있다. 기적만 보고 믿음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라는 말씀이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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