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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27
  • 김근수
  • 등록 2016-04-12 10:22:08
  • 수정 2016-04-12 13: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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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얼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함께 따라갔다. 12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시오.” 하고 위로하시며 14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시오.” 하고 명령하셨다.  

 15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루가 7,11-17)





루카복음에만 보이는 이야기다. 루카는 지금까지 죽음에서 깨어난 사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예수와 제자 일행과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행렬이 마주쳤다. 가파르나움에서 로마군인의 종을 치유했던 분위기를 높이고 7장 22절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앞에서 예수, 로마군인, 군인의 종이, 이 단락에서 예수, 과부, 과부의 외아들이 등장한다. 어떻게 기적이 행해졌는가에 대한 관심보다 예수의 측은지심이 더 강조되었다. 


초대 공동체에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렙타의 과부와 그 아들 이야기는 친숙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 끝 날에 최후의 예언자로 엘리아를 또한 익숙하게 기억했다.(말라기 3,23-24) 그 전승들이 죽음에 대한 유다인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인은 갈릴래아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로 나자렛에서 약 1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구약성서에는 그 지명이 나타나지 않고 신약성서에서는 여기서만 언급되었다. 오늘 그곳에 약 200여명의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스어에서 ‘도시’라는 말은 동네 입구에 문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죽은 사람은 사망 당일 성 밖으로 운반되고 안장되었다. 12절과 13절에 과부 단어가 6번이나 나온다. 예수는 죽은 외아들보다 그 어머니에게 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12절과 13절에 과부 단어가 6번이나 나온다. 모든 것은 바라봄에서 시작된다. 외아들을 과부 어머니에게 돌려준 예수의 행동은 열왕기상 17,23에서 쓰인 단어와 똑같이 묘사되었다. 외아들을 잃은 슬픔은 슬픔의 깊이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구약성서에 자주 언급되었다.(아모스 8,10; 예레미야 6,26; 즈카르야 12,10)


13절에서 예수는 주님으로 처음 표시되었다. 공관복음에서 오직 루카에만, 루카 특유의 자료에만 주님 호칭이 보인다.(루카 7,13; 10,39; 13,15; 16,8) 주님 호칭은 예수 부활을 고백하는 호칭으로 자리 잡았다.(로마서 10,9; 코린토전서 12,3; 필리피서 2,9-11) 14절에서 상여는 나무로 만들어진, 닫히지 않은 관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일어나시오’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을 표시하는 동사로 쓰였다.(루카7,22;9,7;사도행전 3,15;4,10) 중병에 걸린 사람의 치유는 죽음의 힘에서 해방으로 시편 88장은 노래하였다. 


루카는 예수의 인간성을 주저 없이 기쁘게 소개하고 있다. 상여에 손을 대는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은 예수의 말씀 못지않게 중요하다. 만지는 행동은 외면하고 말씀은 기억하는 그저 합리적인 이해는 어딘가 허전하다. 복음은 진리이기 전에 기쁨이다. 하느님 나라는 진리 이전에 먼저 기쁨으로 우리에게 왔다. 그리스도교 교리를 진리로만 우선 이해하고 기쁨으로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현대적 합리성이 야속하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는 세상에 완전히 홀로 남은(열왕기상 17,8-24), 희망 없는 인간의 대명사다. 부양할 자녀가 없는 과부의 삶은 오늘 우리 상상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였다. 장례 행렬을 뒤따른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고맙다.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났다는 이 단락에서 인간의 행위로 생긴 죄를 용서받았다는 상징적 해설이 생기고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유행하였다.(Kremer, Lukasevangelium, 82)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엘리야처럼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났음을 16절에서 노래한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자 요한처럼 위대한 예언자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다.(루카 9,19-20; 24,19-21) 로마군인의 믿음이나 나인의 과부는 시메온의 예언을(루카 2,32) 재확인한다. 죽은 자를 깨어나게 한 예수 이야기는 예수 활동의 최고에 이른다. 예수는 대체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다음 단락에서 곧 나올 차례다. 


16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신명기 18,15), 다시 살아난 예언자 엘리야(말라기 3,23-24)로 보는 것 같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예수에게 예언자 호칭은 안타깝게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가톨릭 전례에도, 미사 경본에도, 각종 기도문에도 예수에게 예언자 호칭을 선사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가 예언적 사명을 스스로 약화시킨 것이다.  


예수는 죽은 외아들을 다시 살렸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와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켰다. 새로운 인간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예수의 능력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과부와 외아들이 다시 만나는 기쁨을 놓치면 안 되겠다. 성서의 주인공은 예수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성서의 당당한 주연배우인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15절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는 구절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서러움을 준다. 세월호 참사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안타까운 광경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때 하느님은, 예수그리스도는 어디서 무엇을 하셨다는 말인가. 과부를 보는 예수의 얼굴에 세월호 유가족을 바라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정이 연상된다. 세월호 참사 현장인 진도 팽목항에서 위령 미사 한번 같이 드리지 않는 한국천주교회 주교들은 이 단락의 예수에게서 무엇을 배웠을까. 


16절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 (루카 1,68.78; 사도행전 15,14) 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생각난다. 1989년 군인들의 총에 맞아 순교한 이냐시오 에야쿠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로메로 대주교와 함께 엘살바도르를 찾아와 주셨다” 하느님은 한반도를 언제 찾아 주시려나. 하느님을 기다리지 않는 우리 자신이 안타깝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는 오늘 한국인 신세 같다. 


모든 것은 바라봄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슬픔, 세상의 악을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그 눈길에서 약자와 희생자에 대한 자비 감각이 생긴다. 자비 감각은 우리를 정의 감각으로 안내한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기꺼이 싸우고 희생한다. 자비와 정의는 함께 상승하고 함께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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