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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28 : 세례자 요한이 보낸 사람들
  • 김근수
  • 등록 2016-04-19 12:28:06
  • 수정 2016-04-20 11: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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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을 불러서 19 주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20 그 두 사람이 예수께 가서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선생님께 보내면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라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과 고통과 마귀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의 눈도 뜨게 해주셨다. 22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이 보고 들은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시오.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습니다. 23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루카 7,18-23)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18-23),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평가(24-28), 세례자 요한과 예수에 대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평가(29-35)로 연결된 세 이야기 중 첫 번째다. 예수에게 놀라거나 반대하는 여론이 이미 있었다(루카 4,32; 5,21). 그 의문은 계속 된다(루카 9,7-9. 18-21). 예수가 정말 메시아인지,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대체 어떤 관계인지 사람들은 궁금하였다. 부활 이후 세례자 요한 제자 공동체의 불안정한 상태도 오늘 이야기 배경중 하나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루카 3,20) 사실이 전제되었다. 그는 사해 근처 마케루스 성에 갇힌 것 같다. 거기서 그는 예수의 활약에 대한 소문을 제자들에게 들었을 것이다(루카 5,33). 한때 제자였던, 그러나 지금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 예수를 세례자 요한이 어찌 잊으랴. 


제자를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보낸 것은 증인 효력을 갖추려는 의도였다(신명기 19,15; 마태오 18,16; 히브리서 10,28). 메시아라고 하지 않고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라고 한 것은 다가올 심판자에 대한 세례자 요한 자신의 말(루카 3,16-)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마치 청문회에 소환되어 세례자 요한에게 질문 받는 장면 같다. “당신이 오실 분입니까?” 예수의 첫 답변은 놀랍게도 자기 해명이 아니라 자기 활동을 보라는 말이었다. 예수의 행동을 보면 예수가 누구인지 알 것이다. 그 부분은 마태오에서 아쉽게도 삭제되었다. 


“보고 들은 대로” 세례자 요한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입문했던 예수가 한때 자신의 스승이던 세례자 요한에게 자신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보고하는 것이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 문하생이지만 이제 세례자 요한을 넘어섰다. 그 사실을 루카는 독자들에게 자랑스럽게 선포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불로 처벌하는 심판자를 기다렸던 것 같다(루카 3,15-18). 그런데,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답변으로 제시하였다. 병자들이 낫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것이 오실 분이 하실 일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냐가 메시아의 특징이라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사실이 예수의 치유 행위보다 강조된 점이 중요하다. 


23절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는 우리 뜻대로 메시아를 추측하지 말고 메시아가 하는 일을 보고서 메시아를 알라는 가르침이다. 메시아를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저 메시아를 확인할 뿐이다. 


오늘 단락이 실제로 세례자 요한이 한 말일까. 복음서 저자에게 그런 관심은 없었다. 초대 교회가 오늘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고, 여러 종류의 메시아 이해가 있었으며, 예수의 메시아 개념은 독특했다는 사실을 루카는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은 조금 이상하다. 예수의 활동이 불로 심판하는 메시아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 예수의 답변도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명쾌하지는 않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거리를 둔 사실로(루카 5,33; 사도행전 19,3-) 보아,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메시아로 보았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부활 이후 세례자 요한 제자 공동체의 불안정한 상태도 오늘 이야기가 나온 배경 중 하나다. 


오늘 단락과 토마스의 질문(요한 20,24-29)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관찰하지 못했다는 보폰의 말은 적절하다(보폰 3/1, 374). 토마스는 예수 부활을 의심하였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의심하였다. 인간은 의심하는 존재다. 외로우니 인간이요, 의심하니 인간이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드러내놓고 세상에 선포했다면, 마르코·마태오·루카는 추리소설 독자처럼 끈질기게 알아보라고 초대하고 있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탄식하였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역사를 왜 사람들이 집중하지 않을까 고뇌하였다. 우리도 그들의 관심을 자세히 보자. 


예수의 자비로운 모습에 당황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에 당황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비로운 메시아에 곤혹스런 사람들, 희생하는 메시아 사상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도 예외가 아닐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가. 메시아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을까. 메시아는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지 않을까. 정치와 종교가 서로 이용하는 모습을 탄식하지 않을까.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속셈과 행위를 예수는 낱낱이 폭로하고 비판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역사에서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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