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근수) 가난한 예수 29 :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증언
  • 김근수
  • 등록 2016-04-26 10:03:07
  • 수정 2016-04-26 10:06:19

기사수정


24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뒤에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습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25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입니까?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왕궁에 있습니다. 26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예언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27 성서에, ‘너를 보내기에 앞서 내 일꾼을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놓으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28 사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 큽니다.”  

29 모든 백성들은 물론 세리들까지도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으나 30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고 자기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3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과 같을까요? 32 마치 장터에서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아이들과도 같습니다.  

33 여러분은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34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합니다. 35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서 드러납니다. (루카 7,24-35) 

 



마르코에는 없고 마태오와 루카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앞 단락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는 어떤 분인지를 예수에게 직접 물었다. 이제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힐 차례다. 그런데, 예수가 제자들이 아니라 군중에게 설명하는 점이 특이하다. 군중도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도 군중은 궁금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했다. 군중을 몰고 다니는 두 예언자 세례자 요한과 예수 아니던가. 군중과 직접 소통하는 예수의 모습이 놀랍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토크쇼라도 좀 하지 그랬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왕을 당당하게 비판했던 사실을(루카 3,19) 예수는 알고 있다. 그 용기를 예수는 칭찬하고 있다.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악한 권력자인 헤로데왕과는 사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사는 세례자 요한의 검소함을 왕궁에서 사는 헤로데왕의 사치스러움과 대조시키고 있다. 예수가 작정하고 하는 말이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은 한국에도 있다.


예수는 군중에게 왜 광야에 나갔는지 묻지 않고 무엇을 보았는지 묻고 있다.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 종교의 출발점이다. 24절 eremos는 사막이 아니라 광야로 번역해야 한다. 갈대는 물이 있는 곳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kalamos는 갈대 하나를 가리킬 수도 있고 갈대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예수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세례자 요한에 비유한 것은 아니다. 군중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허약한 인간으로 세례자 요한을 보지는 않았다. 군중은 예언자를 만나기 위해 광야로 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그 사명에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즉 모든 인간을 넘어선다고 예수는 단언하였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표현은 특히 구약성서 욥기에서 여러 번 보인다. (욥기 14,1; 15,14; 25,4)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기 위해 쓰인 표현이었다. (Michael Wolter, Das Lukasevangelium, 283)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을 증언하기 위해 탈출기 23,20에 영향 받은 말라기 3,1절이 인용되었다. 


세례자 요한을 제외하고 그 어떤 예언자도 어머니 태중에서 성령을 받지는 않았다.(루카 1,15) 그렇게 세례자 요한은 위대하다. 예수의 그 말을 그리스도교는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가. 세례자 요한은 그저 예수를 준비한 분이라는 사실만 줄곧 강조해오지 않았던가. 예수의 말도 외면하는 그리스도교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위대한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예수는 선언하였다. 예수의 분별력이 놀랍기만 하다. 예수는 영웅주의를 싫어하셨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 큽니다’라는 28절에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되었다고 추론한 독일의 개신교 성서학자 Wolter에게(Wolter, 282)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예수는 29절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였다. 30절 율법학자들은nomikoi 마태오 22,35를 제외하면 루카에만 등장한다.(루카 11,45; 14,3)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 알 수 있다.  


31절 ‘이 세대’는 죄 많고 하느님을 적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창세기 7,1; 마르코 8,12; 마태오 12,45) 어린이의 놀이를 주의 깊게 관찰한 예수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이 놀이를 모르는 한국인들이 이 비유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장례식에서 슬픈 애곡을 하였고, 결혼식에서 춤을 추었다. 장례식 놀이에도 결혼식 놀이에도 호응하지 않는 구경꾼들을 예수는 비판하고 있다. 


어린이 놀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성서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놀이에 호응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이 세대 사람들로 여기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춤추는 어린이들은 소년으로, 애곡하는 어린이들은 소녀로 여긴 예레미아스의 주장을(Jeremias, Die Gleichnisse Jesu, 139-)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회개라는 비장한 심판을 강조한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장례식 놀이에 비유되고, 하느님 나라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한 예수의 사명을 결혼식 놀이에 비유되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요청도 묵살하고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도 외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겨냥하는 말이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너무 고행을 강조한다고 비난하고,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려 논다고 비난하였다. 34절과 35절에서 광야에서 생식하는 세례자 요한과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는 예수가 대조되고 있다. 예수처럼 죄인들과 자주 어울리는 종교인은 한국에 어디 없는가. 그런 이유로 비난받는 종교인은 어디 없는가. 


먹고 마시는 예수의 모습이 2세기와 3세기에 신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논란되었다. 예수의 신성을 위협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레네우스는 먹고 마시는 모습을 예수의 인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여겼다.(Irenaeus, Adv Haer IV 31,2)


예수는 자신의 사명에 비추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낮추어 본 것이 아니라 높게 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 자신의 사명은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는 다르며 또한 의미 있다는 점을 루카는 빠뜨리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뛰어난 예언자요 예수는 메시아다. 예언자와 메시아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메시아는 종말론적 마지막 예언자다. 


종교간 대화에서 요긴하게 쓰일 모범 하나를 예수는 이 단락에서 가르쳐 주었다. 남을 깎아내리지 않고 존중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정직하고 당당하게 소개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교 대화에서도 이웃 종교와 대화에서도 우리가 명심할 소중한 원칙이겠다. 


헤로데는 예수가 살던 갈릴래아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였다. 시골뜨기 예수가 감히 지엄하신 왕에게 25절에서 그런 험담을 하다니. 당시에 왕을 함부로 비판하는 자유가 백성에게 있지는 않았다.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목사들은 예수의 이 용기를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한국 주교들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따끔한 말을 할 줄 아는가.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차이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너무 자주 교육받았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가까움에 대해서도 지금보다 더 자주 깊이 생각해야 하겠다. 회개를 촉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으며, 불의한 세력에 저항했으며, 목숨을 바친 예언자인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공동 운명 말이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직후 예수는 숨지 않고 세상에 등장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