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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30 :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
  • 김근수
  • 등록 2016-05-03 10:24:48
  • 수정 2016-05-03 10: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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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37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예수께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38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  

 39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40 그 때에 예수께서는 “시몬, 당신에게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41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42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습니까?”  

 43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겠지요.” 하였다. 예수께서는 “옳은 생각입니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을 계속하셨다. “이 여인을 보시오. 내가 당신 집에 들어왔을 때 당신은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습니다. 45 당신은 내 얼굴에도 입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 맞추고 있습니다. 46 당신은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습니다.  

 47 잘 들어두시오.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48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당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49 그러자 예수와 한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인데 죄까지 용서해 준다고 하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5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평안히 가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7,36-50)




루카에만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베다니아에서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여인 이야기(마르코 14,3-9),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 이야기(요한 12,3-8)와 비슷한 이야기다. 앞 단락에 소개된 예수와 죄인들이 어울리는 모습을 루카는 대표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바리사이와 대표적인 죄인으로 여겨지던 매매춘 여성이 대조되는 이야기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여인은 후대 교회 전통에서 막달라 마리아로 오해되곤 하였다.(루카 24,10) 바리사이와 매매춘 여성이 대조되는 이야기는 루카에만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루카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잔치에서 손님들은 낮은 상 주위로 각자 한손으로 팔베개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있다. 원래 그리스에서 비롯된 이 관습을 유다인들은 차차 받아들였다. 남자 손님들을 위해서만 준비된 식사에 불쑥 여인이, 그것도 죄 많은 여인이 들어왔다. 남자 손님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37절 행실이 나쁜 여자는 매매춘 여성을 가리킨다. 그 여인은 동네에서 널리 알려졌다. 잔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으로도 그 여인은 식사 율법을 어겼다. 잔칫상 가까이에 매매춘 여성이 있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그녀가 왜 잔치에 왔는지 루카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가 예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음이 전제되었다. 


손님의 발치에서 종은 손님의 발을 씻어주었다. 여인은 예수의 앞이 아니라 뒤에서 슬며시 등장하였다. 울었다는 동사가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는 현재완료형으로 쓰여 졌다. 여인은 상당한 시간 동안 실컷 울었던 것 같다. 눈물을 닦을 수건 대신에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사용되었다. 향유 가격을 루카는 밝히지 않았다. 고대에는 알코올이 아니라 기름이 향수 재료로 쓰였다. 


기름부음은 유다 사회에서 왕, 사제, 예언자에게만 전례적으로 행해졌다. 사람들은 머리에 기름을 매일 발랐다. 머리카락은 유다 사회에서 에로틱한 느낌을 주었다. 발에 입맞춤은 존경의 표시였다. 발에 향유를 바르는 행동은 아주 은밀한 여역에 속하는 일이었다.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모습은 예수를 유혹하는 태도로 오해될 수 있었다. 


예수는 자신이 오해받을 상황을 피하지 않았다. 여인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둔 예수의 포용력이 놀랍다. 발을 만지게 놓아둔 예수의 마음을 그 누가 알까. 그녀는 자기 몸으로 자기 습관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가지지 않은 것으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가. 예수는 그것을 이해했고 인정했고 받아들였다.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사랑을 주기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사랑을 내 방식대로 주면 되지만, 사랑을 받는 것은 주는 사람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려야만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주기도 쉽지 않다. 사랑에는 주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먼저 받은 경험이 필요하다. 


그녀는 왜 울었을까. 예수를 보아 기뻐서 울었을까. 자기 설움에 겨워 한없이 울었을까. 그녀는 예수 덕분에 예수 곁에서 맘껏 울 수 있었다. 예수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 흘리는 여인이여, 그대는 아름답다. 용기를 내어 예수 곁에 있는 여인도 아름답고, 오해받기를 감수하고 그녀가 곁에 있도록 배려한 예수도 아름답다. 우리도 예수 곁에서 맘껏 울 수 있다.


회개가 기쁨으로 이어질 수 있고 기쁨이 회개를 이끌 수도 있다. 회개의 눈물보다는 기쁨의 눈물 아닐까. 39에서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를 예언자로 기대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진짜 예언자라면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있어야 한다.(사무엘상 9,19-; 요한 4,17-19) 그러나 여인의 행동을 막지 않았던 예수는 진짜 예언자가 아니라고 바리사이는 생각할 수 있었다. 여인의 개인적 죄와 사회적 지위를 예수가 모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바리사이의 중얼거림을 나무라지 않고 차분히 비유 하나를 들어 가르쳤다. 루카복음에서 바리사이가 예수에게 ‘선생님’didaskale 이라는 호칭을 쓴 것은 40절이 처음이다. 다음에는 선생님 호칭이 계속 나온다.(루카 9,38; 10,25; 11,45 등) 외부 사람들이 그 호칭을 예수에게 썼고, 제자들은 쓰지 않았다. 유다교 랍비들은 채권자와 채무자 이야기를  격언이나 비유로써 즐겨 사용하였다. 비유에 등장한 두 빚진 사람의 사례에서 예수는 바리사이와 여인을 대조하였다. 당시 식사 예절로 보아 바리사이가 잘못한 것은 사실 없었다. 손님들은 주인에게 세밀한 배려를 기대하지 않았고, 주인은 손님들에게 일일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바리사이는 물, 키스, 기름을 예수에게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예수는 바리사이를 혼내려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의 사랑을 격려하려는 것이다. 여인이 한 것을 바리사이는 왜 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는 게 아니다. 당신은 왜 여인보다 적게 사랑했느냐는 말이다. 사랑을 더 할 수 있었는데 왜 적게 사랑했느냐. 이 질문을 예수는 지금 우리에게 하고 있다. 


여인은 사랑을 보였으니 죄를 용서 받았다고 예수는 47절에서 설명한다. 47절 사랑을 보였으니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에서 신학자들은 사랑이 용서의 원인인지 결과인지를 두고 오래 전부터 논쟁을 벌였다. 대체적으로 가톨릭 학자들은 사랑이 용서에 앞선다고 보고, 개신교 학자들은 용서가 사랑에 앞선다고 보는 편이다. 


용서가 사랑을 재촉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용서를 가져온다.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용서 받는다. 사랑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다. 잘못을 범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선행을 게을리 하는 것이 죄다.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죄요,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 죄다. 


가톨릭의 성사 개념을 좁게 이해한 사람들은 고백성사만 죄의 용서를 준다고 오해하곤 한다. 고백성사만 죄의 용서를 주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통회와 자선, 깊은 사랑에도 죄사함의 효과는 있다. 고백성사 끝 부분에서 사제가 하는 인사는 50절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평안히 가시오”에서 왔다. 평화를 비는 말은 작별 인사로 통용되었다.(판관기 18,6; 사무엘상 1,17; 야고보서 2,16) 믿음으로 용서받는 사례는 루카에서 여러 번 소개되었다.(루카 8,48; 17,19; 18,42) 


죄인에 대한 예수의 자비로운 태도가 먼저 소개되었다. 사랑과 믿음이 용서의 조건으로 또한 제시되었다.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이것이겠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여인? 바리사이? 예수? 여인에 대한 예수의 사랑보다 예수에 대한 여인의 사랑이 더 강조되고 있다. 성서 모든 단락에서 주인공이 반드시 예수인 것은 아니다. 우리도 성서의 주인공이다.


바리사이들의 죄는 크게 두 가지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종교적 오만에 빠졌다. 우리 시대에 바리사이는 누구일까.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종교적 오만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바리사이다. 우리 시대에도 매매춘 여성은 있다. 하느님은 오늘도 누구에게 더 마음 쓰실까. 묻는 내가 바보 되겠다. 


오늘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배려를 자주 인용했지만, 여인의 사랑은 흔히 잊었다. 여인의 행동을 해설하기 전에 여인의 사랑을 충분히 음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를 감상하기 전에 시를 분석하려 덤비는 조급증은 사절하고 싶다.


여인은 믿음을 이성이 아닌 몸으로 표현했다. 신학을 몸으로 드러낼 수 있음을 남자 신학자들은 자주 외면하였다. 신학이 몸을 경시하지는 않는다. 언어와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 신학과 신앙에 속하는가. 그렇지 않다. 신학에서 이성은 과장되고 감성과 몸은 경시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몸은 신앙의 도구이자 사랑의 도구이다. 우리 시대에 몸의 신학은 더 소중하고 더 시급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몸의 신학’이 기다려진다. 


매매춘 여성과 예수가 함께 있는 이야기는 교회에 여전히 충격이다. 예수의 자비로움이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충격이다. 그 충격을 모른 체 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여인들이다. 가난한 여인들 중에도 가장 가난한 여인은 매매춘 여성 아닐까. 가난한 여인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 없이는 온갖 신앙 행위가 다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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