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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33 : 비유의 뜻
  • 김근수
  • 등록 2016-05-24 10:28:26
  • 수정 2016-05-24 1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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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예수께 묻자 10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11 “이 비유의 뜻은 이러합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12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아 가기 때문에 믿지도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3 씨가 바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가 내리지 않아 그 믿음이 오래가지 못하고 시련의 때가 오면 곧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4 또 씨가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에 눌려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5 그러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루카 8,9-15)




앞 단락에 나온 뿌려진 씨 비유가 생각보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제자들은 군중에 속하지만 군중과 다르기도 하다.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 신비가 설명된다 (사도행전 1,3). 루카 6,20-, 12,1-처럼 군중이 예수의 설명을 함께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르코 4,10과 달리 예수와 제자들이 집안으로 들어가 있지 않았다. 


10절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라는 부분은 이해하기 난감하고 곤혹스럽다. 예언자의 말을 군중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에 따르면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그러니 군중이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곧 예수가 예언자임을 입증하는 뜻이 되겠다. 


군중이 예수의 비유를 어차피 이해하지 못하게 이미 정해졌다면, 이해하지 못한 책임은 군중에게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군중이 핀잔 받을 까닭도 없다. 예수는 군중들과 조금 다른 제자들의 윤곽을 그리고 있다. 씨앗과 열매를 말씀과 행동으로 이해하는 비유는 성서에 널리 있다 (욥기 4,8; 잠언 22,8; 호세아 8,6; 코린토전서 9,11; 갈라디아 6,7-). 예수는 당시 유행했던 알레고리식 해설을 하고 있다 (갈라디아 4,23-31).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다른 주제로 이해를 넓혀가는 문학적 방식이다. 


길바닥(12), 바위(13), 가시덤불(14), 좋은 땅(15) 등 씨가 놓인 여러 곳은 인간의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씨앗에 영향을 주는 외적 상황으로 예수는 악마(12), 시련의 때(13), 세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을(14) 예로 들었다. 외적 상황에 대한 인간의 내적 마음가짐으로 믿지 못하고(12), 믿음이 오래가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13),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14)이 소개되었다.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 6,9 이하를 인용했을 뿐이다 (참조, 요한 12,40; 사도행전 28,26). 9절에서 “그들이 알아보고 알아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마르코 4,12; 참조, 이사야 6,10)가 삭제되었다. 군중의 회개 가능성을 루카는 열어두었다. 


하느님 나라 신비를 제대로 알기 위해 부활이 필요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교육을 받지 않았던가.(루카 24,26. 45-47) 성령을 통해 완전한 지혜에 이르지 않았던가 (요한 16,13). 부활을 알고 성령을 받은 우리는 제자들처럼 하느님 나라 신비를 잘 알아들을 입장에 있다. 


제자들과 군중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라도 있다는 말일까. 제자들은 예수에게 무슨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말일까. 그런 뜻을 오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전해주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예수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 신비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얼마나 인내심이 필요한지 오늘 단락에서 느낄 수 있다. 예수를 직접 보고 들었던 군중 대부분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를 직접 만나지도 못한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더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것인가. 


예수를 엉터리로 알려주거나 잘못 알려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자나 교회가 말로 예수를 전하면서 행동으로 예수를 믿지 말라고 얼마나 홍보하고 있는가. 성직자들이 말씀과 전례와 성사로는 예수를 전하고 증거하지만, 그 삶으로는 예수를 믿지 말라고 얼마나 외치고 다니는가.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세태에서 ‘예수는 좋지만 성직자는 싫다’는 말까지 있는 오늘이다. ‘신부 보고 성당 다니냐? 예수 보고 다니지’ 라는 말이 성직자 입에서 나와서야 되겠는가. 


오늘 이야기가 생긴 삶의 자리는 무엇일까. 어떤 사회학적 배경에서 생긴 이야기일까. 예수를 놓고 유다교 내부에서 분열이 있었다.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거절하는 모습에 루카 공동체는 충격을 받았다. 초대 공동체는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에 대해(마르코 4,10-12) 이사야서 6,9-10에서 위로를 받았다.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자부심을 주어야 하는 과제도 있었다. 군중과 제자들은 예수를 거절하는 유다인들과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말씀과 행동 사이의 연결뿐 아니라 예수를 두고 일어난 이스라엘의 분열이 이 단락의 배경이다. 13절 시련의 때는 한국 신자들에게 예수 시대보다 분명히 적다. 그러나 14절 재물과 현세의 쾌락의 위험은 오늘 더 강하고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하느님 나라 신비에 대해 읽고 배운다. 그러나 나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고 싶다. 예수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 너무나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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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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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6-05-30 21:50:35

    가난한 예수 33 잘 보았습니다.
    1. '13절 시련의 때는 한국 신자들에게 예수 시대보다 분명히 적다. 그러나 14절 재물과 현세
    의 쾌락의 위험은 오늘 더 강하고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말씀이 와 닿습니다.
    2. 마지막 '우리는 성서를 통해 하느님 나라 신비에 대해 읽고 배운다. 그러나 나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고 싶다. 예수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 너무나 부럽다.'
      1) 저 같은 경우 예수를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2) 성서를 통해 읽고 배우지만, 신앙은 하느님께 직접 구하고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쉬워도 이런 응답을 기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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