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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35 : 참 가족과 형제자매
  • 김근수
  • 등록 2016-06-14 10:05:12
  • 수정 2016-06-14 1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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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21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8,19-21)





마르코 3,31-35를 보고 조금 다듬은 이야기다. 20절과 21절은 도마복음 99,1-2에도 거의 글자 그대로 있다. 21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오늘 표제어다. 그 모범은 바로 예수다. 루카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덤으로 가족 개념이 확장되었다.


예수 어머니 마리아는 루카 1장과 2장에서 이미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19절 형제들은 혈육의 형제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히브리 언어 관습에 따르면 친척을 가리킬 수도 있다. 20절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온 사실을 예수에게 전했다 (마태오 12,47). 그러나 마르코에서는 예수 어머니와 형제들이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했다 (마르코 3,31). 왜 찾아왔는지 루카는 마르코와 달리 설명하지 않았다. 21절 예수의 답변에서 루카는 마르코와 마태오와 달리 누이라는 단어를 빼버렸다. 


예수를 어머니와 가족들도 보고 싶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집 떠나 유랑하는 예수를 가족들은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밥은 먹고 다니는지, 어디서 잠을 자는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누구와 어울리는지 얼마나 궁금했을까. 자녀를 군대에 보낸 부모들은 그 심정 알 것이다. 자녀를 외국에 보냈거나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들은 그 심정 알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가. 보고 싶다 (루카 9,9; 19,3-4; 23,8).


예수는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그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자매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오늘 단락에서 결국 예수와 가족들이 만나지 않았다고 단정해버린 Wolter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Wolter, 312).


예수는 전갈에 답변하지 않은 채 격언 하나로 마무리한다. 21절은 예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예수가 면박주는 말이 아니다. 예수와 가족 사이에 어떤 갈등을 오늘 이야기에서 찾아낼 수는 없다. 오히려 예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에 속한다 (루카 1,38; 사도행전 1,14). 루카는 예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루카 2,19과 11,27처럼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잘 실천하는 모범으로 제시하려 했다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 725). 


마리아는 성령강림 이후에야 비로소 제자단에 합류했다. 마리아가 예수 어머니인 탓에 뒤늦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주어진 신앙 때문에 그렇다고(루카 1,38; 2,19.51) 개신교 성서학자 보폰은 말했다 (Bovon, Das Evangelium nach Lukas III/1, 419). 나는 그의 주장에 찬성한다.


20절이 보는 것을, 21절은 들음을 강조한다. 20절은 외부 상황을, 21절은 내적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신앙에도 삶에도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보이는 현실이 있고 듣는 태도가 있다. 보이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고 듣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주시는 말씀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고 듣는 것이 신앙에서 중요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고 듣는 것이 불편하고 두려울 수 있다. 악의 세력은 사람들이 현실을 정직하게 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언론을 통제하고 장악한다. 사람들이 현실을 정직하게 보도록 가르쳐야 할 곳이 종교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인민에게 아편이다. 인간에게 관심이 있다는 종교가 어찌 역사와 현실을 언급하지 않을까. 현실과 역사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종교는 악의 세력을 편드는 것이다. 역사를 현실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종교인은 사기꾼이요 악마의 종이다. 


오늘 이야기는 루카의 뜻과 다르게 마리아 평생 동정 주제와 연결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루카가 의아할 노릇이다. 루카 의도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라는 메시지였을 뿐이다 (요한 5,14). 성서 저자의 뜻을 외면하고 엉뚱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생물학적 족보에 의존하는가 또는 윤리적 차원에서 보아야 하는가. 우리 시대 중요한 화두 하나를 루카는 선물하였다. 이런 질문을 해도 좋지 않을까.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종교적 족보(세례)가 더 중요한가 윤리적 차원이 더 우선인가. 종교간 대화에서도 요긴한 원칙 하나를 또 발견하였다. 


예수가 가족관계의 중요성을 약화시켰다고 과장할 필요는 없다. 루카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가족관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기초 위에 가족개념을 확장시킨 것이다. 이웃의 개념을 민족에서 인류로 확장한 예수를 보자.


우리 시대 가족의 중요성은 더 강조되고 있다. 사회 환경이 더 복잡해지고 뒤틀린 가족이 더 늘어나는 오늘이다. 가족은 삶과 신앙의 기초다. 가정이 흔들리면 신앙도 흔들린다. 가정은 보수적 단위가 아니라 기초 단위다. 가족 없이 개인 없다. 가족 없이 신앙 없다. 


구조악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해방신학도 가족의 중요성을 언제나 강조해왔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에서 해방된 가정만이 신앙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해방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가정을 만드는데 유익하고 필요하다. 가정은 보수파들의 독차지가 아니다. 성가정은 기도와 성사와 전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과 역사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보는 자세가 성가정을 이루는 중요한 기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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