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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36 : 잔잔해진 풍랑
  • 김근수
  • 등록 2016-06-21 09:59:59
  • 수정 2016-06-21 10: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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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배를 젓기 시작하였다. 23 일행이 호수를 건너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 때 마침 뭍으로부터 호수로 사나운 바람이 내리불어 배에 물이 들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24 제자들은 예수께 가서 흔들어 깨우며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과 사나운 물결을 꾸짖으시자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지고 바다가 고요해졌다. 25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분의 믿음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시며 책망하셨다. 그들은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바람과 물결까지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가?” 하고 서로 수군거렸다. (루카 8,22-25)




풍랑에서 구조된 제자들(22-25), 마귀 들린 사람의 구출(26-39), 야이로의 딸 소생(40-56) 등 세 가지 구원의 이야기가 연속해서 소개된다. 마르코 4,35-41과 마태오8,23-27에 같은 이야기가 있다. 풍랑에서 구조된 제자들이 예수에게 첫 번째 도움을 받았다. 얼른 보면 예수의 놀라운 능력이 주제일 것 같으나 제자들에게 묻는 예수의 질문이 사실 핵심이 되겠다(Kremer, 94). 성서학계에서 이른바 자연 기적으로 불리는 이야기중 하나다. 기적 이야기에서 예수는 누구인가 묻는 것이다. 제자들의 구출과 예수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이 기록되었다.  


마르코 4,33-34에서 비유로 가르친 후 저녁에 예수는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자고 한다. 루카에는 저녁이라는 말이 없어졌다. 마르코의 보도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호수에서 저녁은 고기를 잡는 시간이고 배로 항해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군중을 남겨 둔 채 다른 배들도 따라갔다는 마르코 4,36도 역시 이상하다. 그래서 루카는 저녁이란 단어와 다른 배들의 항해 보도를 삭제했다.


남자 제자 열둘만 데리고 예수가 배에 오른 것 같지는 않다. 여자 제자들도 동승한 것 같다. 배 한 척에 모두 탄 것 같다. 초과 승선이 아니라고 보기 어렵다. 처음부터 무리한 항해였다. 배를 타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한 사람은 좌우간 예수였다. 동승자들의 안전에 예수가 책임져야 한다. 가자고 해 놓고서 예수는 잠이 들었다. 너무 피곤했을까, 


구약성서에서 잠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시편 7,7; 이사야 51,9).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노를 젓지 않았다. 예수는 갑질 하셨나. 노를 저으면서 잠에 빠질 수는 없겠다. 뱃사람이 아닌 목수 예수는 밤에 호수에 바람이 세다는 사실을 잘 몰랐을까. 어설픈 예수가 설치는 바람에 제자들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니 제자들이 세상 모르고 잠든 예수에게(요나서 1,5)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고 역정을 낸 것은 당연하다. 


머쓱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뭐라 하지도 못하고 바람과 사나운 물결을 꾸짖었다 (시편 18,16; 65,8; 104,7). 루카는 산에서 둥글게 호수 서쪽을 갑자기 휘감아오는, 아래에서 위로 부는 회오리 바람을 생각한 것 같다 (욥기 21,18; 지혜서 5,14). 24절에서 제자들과 예수의 반응은 다르게 소개되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죽게 되었다고 소리쳤고, 예수는 바람과 사나운 물결에게 소리쳤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연상할 수 있다 (탈출기 14, 15-31).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는 말은(마르코 4,39; 시편 65,8; 107,29) 루카에서 삭제되었다. 


마르코와 루카에서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의 말이 조금 다르다. “왜 그렇게들 겁이 많습니까? 아직도 믿음이 없습니까?”(마르코 4,30) 하고 예수는 믿음 없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루카에서 예수는 “여러분의 믿음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라고 책망하였다. 마르코에서 제자들의 믿음은 아예 없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루카에서 제자들의 믿음은 이미 있는 것처럼 전제되었다. 마르코에서 제자들은 가장 형편없는 모습으로 자주 소개되었다. 루카에서는 제자들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믿음을 잃어버리는 약한 모습이 드러났다. 


바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유다인들은 바다를 무서워했다(요나 1,4-6; 사도행전 27,14-44). 25절에서 제자들은 두렵기도 하였지만(루카 1,12; 5,8), 예수에 대해 놀라워했다(루카 1,63).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무언가 놀라운 일이 생겼음을 제자들은 느꼈다. 그 놀라움은 엘리자베스의 친척들(루카 1,63), 목동들(루카 2,18), 예수의 부모(루카 2,33) 나자렛 주민들과(루카 4,22) 연결된다. 모두 예수의 능력에 대해 놀라워했다. 예수는 대체 어떤 분인가.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제자들(루카 24,12. 41) 모습은 결국 독자들에게 향하는 질문이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루카 18,8) 예수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자꾸만 흔들리는 우리 믿음이 초라하게 다가온다. 제자들이나 우리는 길바닥에 떨어진 씨처럼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 12).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제자들처럼 예수가 곁에 있어도 두렵기만 하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가 잠들었어도,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부활 이후 겉으로 보면 예수가 떠난 것처럼 여겼던 초대 공동체 신자들에게 오늘 이야기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들은 풍랑 속의 배에 탄 승객들처럼 불안하고 두려웠다. 


예수의 능력에 감탄하지만 말고 예수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음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수에게 두려움만 느끼면 아직 믿음에 이르기 어렵다. 예수에게 놀라움을 느껴야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 예수를 가까이 느껴야 믿음이 생긴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기 어렵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믿음을 지닐 수 있다고 착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예수는 지금도 우리 곁에, 특히 가난한 사람으로 있는데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를 보지 못한다면, 어디서 예수를 찾을 것인가. 


교회 역사에서 풍랑에 흔들리는 배는 박해와 유혹에 시달리는 위태로운 교회에 비유되었다. 배는 침몰할 수 있다. 물 속에 가라앉는 배를 보고도 ‘가만 있으라’ 하고 승객들에게 소리칠 셈인가. 어서 건져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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