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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37 : 마귀와 돼지떼
  • 김근수
  • 등록 2016-06-28 1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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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들은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사 지방에 다다랐다. 27 예수께서 뭍에 오르셨을 때에 그 동네에서 나온 마귀 들린 사람 하나와 마주치시게 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옷을 걸치지 않고 집 없이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28 그는 예수를 보자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질렀다.  

 29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 더러운 악령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여러 번 악령에게 붙잡혀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인 채 감시를 받았으나 번번이 그것을 부수어버리고 마귀에게 몰려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던 것이다. 30 예수께서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에게 많은 마귀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31 마귀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처넣지는 말아달라고 예수께 애원하였다.  

 32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33 마귀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34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35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36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사람이 낫게 된 경위를 알려주었다. 37 게르게사 근방에서 나온 사람들은 모두 몹시 겁을 집어먹고 예수께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떠나가셨다.  

 38 그 때에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를 따라다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39 “집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일을 이야기하시오.” 하고 이르셨다. 그는 물러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해주신 일을 온 동네에 널리 알렸다. (루카 8,26-39)

 



마르코 5,1-10, 마태오 8,28-34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앞 단락에서 예수가 말한 “호수 저편”(루카 8,22)은 이방인 지역을 가리킨다. 앞 단락에서 예수는 바람과 풍랑이라는 자연의 힘을 제압했으니 이제 악마의 힘을 압도할 차례다. 루카에서 예수가 수난 전에 이방인 지역에서 이방인과 접촉하는 유일한 사건이다. 루카는 예수의 신적 능력을 소개하고 악마의 시대는 이제 끝났음을 말하려 한다. 


예수는 왜 이방인 지역으로 갔을까. 갈릴래아 호수는 예수의 주요 활동 지역중 하나다. 예수는 갈릴래아 호수 양쪽을 왔다 갔다 했다. 이쪽은 유다인 지역이고 저쪽은 이방인 지역으로 나뉜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는 낮에 성전 안에서, 밤에 성전 밖에서 머물렀다. 갈릴래아 호수 양쪽을 오가듯, 성전 안팎을 오가는 것이다.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 활동을 그렇게 두 세계로 나누어 배치했다. 


26절 게르게사는 1세기 중반 그리스인들이 살기 위해 건설한 10개 도시중 하나다(마르코 5,20). 갈릴래아 호수에서 길레앗 산맥(창세기 31,21) 남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졌다. 그곳에 유다인이 살지 않았음을 루카는 알고 있다. 도시들 사이에 사람이 살지 않는 빈 공간은 두려운 곳으로 여겨졌다(Bovon, 3/1 433). 


옷을 걸치지 않고 집 없이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이사야 65,4) 마귀 들린 사람이 등장했다.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말은 그가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피식민지 백성이야 마치 죽은 목숨 아니던가. 독재정권 아래 사는 사람들은 마치 죽음을 살아서 이미 체험하지 않는가. 마귀는 어둠의 힘이 지배하는 이방인 지역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로마 군대의 식민지 지배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이 담긴 이야기다. 로마 군대를 쫓아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마귀 들린 사람의 고통스런 일상을 자세히 설명한 사실이 놀랍다. 성서는 예수 이야기만 하는게 아니다. 성서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관심이 크다. 예수를 만나기 전과 후에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예수 뿐 아니라 성서에 등장한 사람들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갖는게 좋다. 그렇게 해야 예수를 우리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예수를 만난 사람 아니던가. 


28절에서 마귀는 예수를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악의 세력은 의로운 사람을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을 맨먼저 알아본다.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요청은 마귀가 예수에게 이미 굴복했음을 나타낸다. 


30절에서 예수는 왜 마귀 들린 사람에게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까. 예수가 이미 마귀를 이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누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느냐 물었다. 누가 인간을 괴롭히는지 예수는 정확히 알고 싶다. 예수는 지금 한국인에게 묻고 있다. 누가 지금 한국인을 괴롭힙니까. 누가 한국인에게 마귀입니까. 


30절 군대legio는 로마 군대 6,000명 단위 부대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다. 천사들처럼(마태오 26,53) 마귀들도 군대처럼 조직되었다. 마귀가 로마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은 로마에 반대하는 뜻으로 이해된다(Wolter, 319). 그렇게 많은 숫자의 마귀가 한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조선 사람 하나를 얼마나 많은 일본 군대 귀신이 괴롭혔을까. 마르코에서는 돼지 2,000 마리가 등장했었다(마르코 5,13). 루카는 그 숫자를 삭제하였다. 


마귀들은 예수에게 두 가지를 청하였다. 자기들을 지옥에(창세기 7,11; 로마 10,7; 요한 묵시록 20,1) 처넣지 말고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땅 속, 땅, 하늘의 3층 구조라는 당시 세계관에서 지옥은 죽음의 자리다. 지옥은 또한 처벌받는 자리다. 마귀는 죽기 싫다는 뜻이다. 또한 이스라엘 밖으로 물러가기 싫다는 것이다.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은 이 세상에 계속 있고 싶다는 뜻이다. 죽기 싫고 살아서 계속 지배하겠다는 말이다. 로마 군대는 점령지를 떠나기 싫고 계속 지배하겠다는 뜻이다. 식민지 피지배 백성의 입장에서는 점령군대가 계속 주둔하는 것이 곧 지옥인데 말이다. 친일파 아래서 사는 것이 지옥인데 말이다. 


돼지떼가 있다는 사실은 그곳이 이방인 지역임을 가리킨다(레위11,7; 신명기 14,8). 33절에서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들은 스스로 운명을 정하였다. 돼지떼 죽음에 예수는 책임 없다. 악마는 결국 멸망한다. 악마가 이방인 지역까지 지배한 것이 끝장났다. 로마 군대가 이스라엘에서 쫓겨났다.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서 쫓겨났다. 마귀에서 해방된 그 사람은 33절에서 마치 제자처럼 예수 앞에 앉아 있다. 해방을 선물한 예수 곁에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자세로 있다. 


39절에서 집으로 돌아감은 치유의 상징이다. 사회로 복귀하고 사람들의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마귀에서 해방된 그 사람은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가 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돌려보내며 집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일을 이야기하라고 부탁하였다. 예수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기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 Kremer의 생각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Kremer, 97). 


예수는 그를 제자로서 이방인 지역에 파견한 것이다. 그는 따라다니는 제자가 아니라 파견된 제자가 되었다. 그는 교회 역사에서 아쉽게도 주목받지 못하였다. 예수의 능력을 이방인 지역에 자랑한 이야기다. 해방을 맛본 사람은 해방자 예수를 해방자 하느님을 온 세상에 기쁘게 전한다는 이야기다. 예수에게 도움받은 사람은 스스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자청하고 앞장선다. 


정치적 의미가 큰 이야기를 단순히 기적 이야기로 좁게 해설하는 학계와 교회 풍토가 안타깝다. 성서에는 전문가지만 역사와 현실 감각이 둔한 많은 성서학자들은 그렇게 자기 한계를 자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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