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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38 :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 김근수
  • 등록 2016-07-05 10:24:34
  • 수정 2016-07-05 10: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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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예수께서 배를 타고 돌아오시자 기다리고 있던 군중이 모두 반가이 맞았다. 41 그 때에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와주시기를 간청하였다.  42 그의 열두 살쯤 된 외딸이 거의 죽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 집으로 가실 때 군중이 그를 에워싸고 떠밀며 쫓아갔다.  

43 그들 중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가산마저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 병을 고쳐주지 못하였다.  44 그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 순간에 출혈이 그쳤다.  

45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습니까?” 하고 물으셨으나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베드로도 “선생님, 군중이 이렇게 선생님을 에워싸고 마구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46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나에게서 기적의 힘이 뻗쳐 나갔습니다. 누군가가 내 옷에 손을 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47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떨면서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며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이유며 병이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당신 믿음이 당신을 낫게 하였습니다. 평안히 가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8,40-48) 

 



과부의 외아들 죽음(루카 7,12)과 회당장의 외딸 이야기는 서로 대응하는 이야기다. 그 사이에 열두 해 동안 질병을 앓던 어느 여인 이야기가 끼어 있다. 예수와 그녀의 대화는 아름다웠다. 믿음으로 치유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예수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부분이다. 이런 일화를 읽던 복음서 독자들은 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책을 분석할 때 독자도 함께 생각해야 하겠다. 복음서를 연구할 때 독자를 함께 연구하는 것이다. 


루카복음이 쓰여졌을 때 예수 추종자들은 예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심정을 생각하며 이 부분을 읽는게 좋겠다. 기다리고 있던 군중이 모두 예수를 반가이 맞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기다리는 군중의 모습 같다. 로메로 대주교를 기다리던 가난한 사람들 같다. 루카는 예수와 군중의oklos 관계를 이해 정도가 아니라 환영하는 수준으로 보여주고 있다(Wolter, 324). 


착한 양떼들은 착한 목자를 기다린다. 악한 목자를 기다리는 착한 양떼는 없다. 로메로 대주교는 말했다. “이렇게 착한 양떼와 함께라면, 착한 목자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성은 화답하였다. “이렇게 착한 목자와 함께라면, 착한 양떼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도 제발 그렇게 답하고 싶다. 착한 목자, 한국에 어디 있는가. 로메로 대주교 닮은 주교는 있는가. 양떼를 탓하지 말라.  


예수는 군중 한복판에 서 있다(루카 8,4.19). 군중 속의 하나인 회당장이 예수 발 앞에 엎드려 이방인 군인(루카 7,3-6)과 달리 자기 집에 와주기를 간청하였다. 그가 예수에게 다급하게 매달린 사연은 두 가지다. 열두 살, 즉 결혼 적령기의 혼기가 찬 딸이, 그것도 외딸이(루카 7,12; 9,38) 거의 죽게 되었다. 자녀 숫자가 지금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고대 사회에서 외딸이 주는 의미는 대단하였다. 딸 가진 부모는 그 심정 알리라. 예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알았던 것 같다. 딸이 없는 부모나 미혼, 비혼자, 독신자들은 그 마음 정말로 알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테러리스트는 딸 아닌가. 


안식일에 예배를 책임지고 진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공동체를 이끄는 업무를 맡는 사람도 있었다. 두 업무를 한 사람이 맡기도 했다. 모두 회당장이라 불렸다(Wolter, 325). 회당장이 예수에게 무릎을 끓며 애원하는 부분을 읽었을 때 유다교 회당에서 쫓겨난 루카 공동체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당시 사정을 잘 모르는 지금 한국인 독자들은 루카 공동체 사람들의 벅찬 감격을 이해하긴 쉽지 않겠다. 


예수를 에워싸고 떠밀며 쫓아간 군중은 호기심과 긴장에 가득하다. 열두해나 질병을 앓은 여인이 군중 속에 파묻혀 예수를 따라갔다. 그녀는 의사들에게 보이느라 가산을 탕진한 상태였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예수에게 품고 예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드디어 바짝 따라붙었다. 그녀는 율법적으로 부정한 상태여서(레위 15,19-27) 외부와 접촉해도 군중 속에 끼어 있어도 안되었다. 


그녀는 이제 아무 재산도 없다. 사람들과 고립되어 살아야 한다. 살아 있으나 마치 죽은 목숨과 같다. 불쌍한 여인들이 세상에 왜 그리 많은가. 큰 죄는 남자들이 거의 다 지은게 아니던가. 그녀는 용기를 내어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를 따라갔다. 그녀와 대화한 예수도 율법을 어겼다. 예수는 하루 동안 부정한 상태다. 죄송한 마음에서 감히 앞에 나서진 못하고 예수 뒤에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장하다 여인이여, 그대의 용기가 대단하다. 


옷자락을 만지면 치유의 힘이 전해진다는 생각이 당시 있었다(마르코 6,56; 마태오 14,36; 루카 6,19; 사도행전 19,12). 충실한 유다인 예수는 모세가 정한 율법에 따라 상의 옷자락 네 모서리에 술을 달고 다녔다(민수기 15,37-39; 신명기 22,12). 세 술은 흰색, 하나는 자주색 실로 만들어졌다.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을 붙잡기 쉬웠다.  


예수는 그녀를 추궁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용기를 낸 여인을 보고 위로하고 싶었다. 여인과 예수의 나이 차는 크지 않았던 것 같다. 48절에서 우리말 번역에 ‘여인아’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딸이여’ 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 딸이라는 호칭은 유대 사회에서 가족 외에도 조금 나이가 어리거나 낮은 신분의 여인에게 쓰기도 했다(시편 44,11; 애가 4,21-22). 예수는 여인에게 “딸이여” 라고 따스하게 부른다. 용기 있는 사람이 은혜를 입는다. 용기 있는 사람이 사랑을 얻는다. 하느님께 매달리는 데 게을리하지 말라. 하느님은 주시는 데 게으르지 않은 분이시다.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듣고 여인은 자신의 행동을 모든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말하였다. 용기 있고 더구나 정직한 여인이다. 예수는 여인의 태도에 감탄하였다. 여인의 믿음은 치유와 구원이 예수에게 있다고 확신한 것이었다(루카 5,20; 7,9; 8,25).


용기를 내어 예수를 찾은 사람들이 성서에 많이 소개되었다. 환자들, 마귀에 시달린 사람들, 장애인들이 대부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찾은 것이다. 어디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다. 살아 있으나 마치 죽은 목숨과 같은 여인에게 예수는 ‘평안히 가시오’ 라고 위로하였다. 


희생자를 편들기 위해 예수는 율법을 어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오해받을 상황도 피하지 않았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진정 자유롭게 행동한다. 남의 시선이 두려워서, 종교 규칙을 의식해서 희생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종교인이라고 크게 다른가. 


격식, 전통, 관행, 교회법, 신자들의 의무가 그리 중요하던가. 예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기 위해 종교 규칙을 기꺼이 어길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그리스도인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선택하고 배려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율법을 이유로 유다인에게 보내던 차가운 시선을 이제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하겠다. 


오늘 누가 종교인을 찾아가는가. 누가 용기를 내어 종교인을 찾는가. 만나주기나 하는가. 명동성당은 무엇하는 곳인가. 주교들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사람들이 주교를 찾기 전에 주교가 사람을 찾아가야 옳지 않은가. 한국 주교들은 어디서 무엇하고 있는가. 주교가 귀족인가, 고관 대작인가. 어디서 그렇게 배웠는가. 누가 그렇게 가르쳤는가. 예수가 그렇게 가르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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