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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39 : 야이로의 딸
  • 김근수
  • 등록 2016-07-19 10:27:38
  • 수정 2016-07-26 14: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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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은 죽었습니다. 저 선생님께 수고를 더 끼쳐드리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딸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51 그 집에 이르러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아무도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52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죽었다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울지 마시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으나 53 사람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코웃음만 쳤다.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붙잡으시고 “아이야,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셨다. 55 그러자 그 아이는 숨을 다시 쉬며 벌떡 일어났다. 예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56 그 아이의 부모는 깜짝 놀랐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셨다. (루카 8,49-56) 





과부의 외아들 죽음과(루카 7,12) 회당장의 외딸 죽음은 둘 다 비극이다. 치유에서 죽음을 극복한 사건으로 예수의 능력은 최고조에 이른다. 앞 단락에서 열두 해를 하혈병으로 앓던 여인의 치유는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킨 사건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야이로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비추소서’(민수기 32,41; 신명기 3,14)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소서’(사무엘하 21,19; 역대기상 20,5) 라는 뜻이다. 회당장의 외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예수를 에워싸고 떠밀며 쫓아갔던 군중은 얼마나 허탈했을까. 소식을 회당장에게 전한 사람은 예수가 질병 치유는 해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진 못할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창세기 21,17; 탈출기 14,13; 이사야 35,4). 하느님이 쓰시는 단어를 예수가 쓰고 있다. 하느님과 예수의 일치를 성서는 강조하는 것이다. 믿기만 하시오pisteuein은 하느님이 우리를 구출하실 것임을 신뢰한다는 말이다(탈출기 14,30-; 시편 78,32; 116,10).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특별한 증인으로서 루카에서 처음 언급된다.(루카 9,28; 마르코 14,33) 예수와 연결된 중요한 사건에 등장하는 세 제자들이 바로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오늘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마르코 5,37에서와 다르게 야고보보다 요한 이름이 먼저 나왔다(루카 9,28; 사도행전 1,13). 야고보가 요한보다 이름이 먼저 나온 곳도 있다(루카 5,10; 6,14; 9,54) 성서 저자들은 성서학자들을 골탕먹이러 작정했는가.  


51절처럼 군중이 치유 장소인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장면은 흔하다(마르코 7,33; 8,23; 사도행전 9,40; Bultmann,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329). 기적을 일으키는 과정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아서 기적의 신비감이 더해지는 것이다. 52절에서 사람들은 통곡하며 이미 장례 절차를 시작하였다. 예수는 울지 말라고 부탁한다(루카 23,28). 딸의 죽음 앞에서 예수는 죽음의 힘을 부인하고 있다(Kertelge, Die Wunder Jesu im Markusevangelium, 116). 52절처럼 잠은 죽음을 가리키는 은유로 자주 쓰였다(고린토전서 7,39; 테살로니카전서 4,13; 베드로후서 3,4). 


손을 붙잡은 예수는(마르코 5,41; 마태오 9,45; 루카 1,40) 아이가 숨을 다시 쉬게(창세기 6,17; 고린토전서 17,17: 심손(판관기 15,19), 엘리야(열왕기상 17,21)) 일으켰다. 손을 잡는 것은 도움의 손길이요 구원의 손길을 뜻한다(시편 73,23; 이사야 41,13; 42,6). 숨을 다시 쉬게 되었다는 표현은 범상치 않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사흘은 시신 곁에서 머문다고 유다인은 생각했었다. 아이의 숨이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이다.


야이로의 딸 기적은 죽은 지 며칠 지난, 그래서 관 속에 있던 외아들의 깨어남보다 크다(루카 12-13).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의 깨어남보다 더 크다(요한 11,17). 루카는 부활에 사용되던 동사를 54절 일어나다egeiro 55절 숨쉬다anistemi 이미 쓰고 있다. 


56절에서 아이의 부모는 깜짝 놀랐다. 함께 있었던 세 제자들의 반응을 루카는 전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죽음을 이긴 예수의 능력이 아직은 널리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홍보를 사절하는 정도가 아니다. 돈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는 예수다.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어도 예수는 돈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 종교 행위로써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경우가 종교 역사에 얼마나 많았던가. 각종 종교 의식과 기도에 돈을 당연히 받는 오늘 종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하느님을 믿으라고 예수는 부탁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시는 하느님을 가난한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슬픈 일이다. 해방신학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게 곧 해방신학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군중 속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언제나 먼저 찾는다. 그것이 예수의 모습이다. 병자와 죽은 자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예수의 실천를 독자들은 알게 되었다. 해방신학의 표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다. 그 선택을 예수가 이미 했다. 예수는 최초의 해방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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