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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0 : 열두 제자 파견
  • 김근수
  • 등록 2016-07-25 10:18:13
  • 수정 2016-07-26 14: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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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든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주라고 보내시면서 3 이렇게 분부하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마시오. 지팡이나 식량 자루나 빵이나 돈은 물론, 여벌 내의도 가지고 다니지 마시오.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으시오. 5 그러나 누구든지 여러분을 환영하지 않거든 그 동네를 떠나시오. 떠날 때에는 그들에게 경고하는 표시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시오.” 6 열두 제자는 길을 떠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며 이르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주었다. (루카 9,1-6) 




루카복음 연구자들은 9장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 9장을 어떤 단락으로 나누어야 할지, 각 단락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9장을 루카복음 여행기 또는 핵심 부분 등으로 보자는 여러 제안이 있었다. 루카복음 역시 마르코복음처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 활동을 소개하는 첫 부분에서 마지막이 9,1-50이다. 둘째 부분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죽음의 여정에 대한 안내서 역할이 바로 9장이다. 마르코 6,45-8,26 부분을 대본으로 하고 있다. 


오늘 단락이 마르코 6,7-13을 대본으로 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초대 공동체의 선교 환경이 오늘 단락이 생긴 배경(삶의 자리)이다. 공동체에서 하느님 나라 선포는 차차 약화되었고 부활한 예수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루카복음에서 세번 째로 열두 제자가 한 그룹으로 등장한다. 부름 받음(루카 6,12-16), 여자 제자들과 함께 다님(루카 8,1-3), 이제 예수의 선교에 동참하게 된다.


예수가 열두 제자를 불러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었다는 1절 첫 문장이 핵심이다. 루카 6,12-16에서 예수에게 부름 받았고 그후 스승과 함께 다녔던 제자들이 이제 파견되는 것이다. 제자들의 임무는 두 가지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루카 4,43)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다. 병자를 고치는 일은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으니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 선포가 제자들의 임무 그 자체다. 제자들의 임무는 예수의 활동과 같다(루카 6,18; 9,11). 1절에서 권세(exousia)와 능력(dynamis)은 하느님이 예수에게 주신 특징이었다(루카 4,36; 5,17. 24. 8,46). 그것을 이제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어깨가 무겁다. 예수가 해온 일을 제자들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2절 보내다(apostellein)에서 사도(apostoloi)라는 (루카 6,13) 단어가 나왔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주게 된다.(마태오 10,7-; 루카 4,40; 6,18-; 8,2) 마르코 6,7과 달리, 그리고 루카 10,1에서 일흔 둘 제자들 경우와 달리 둘씩 파견되진 않았다. 루카 10,1과 다르게 제자들은 예수 오심을 알리진 않는다.


루카에서 제자들에게 준 여행 지침은 마르코에서와 조금 다르다. 7절에서 지팡이나 식량 자루나 빵이나 돈, 여벌 내의도 금지되었다. 마르코 6,8에서 지팡이는 허용되었다. 마태오 10,10에서 지팡이는 금지된다. 지팡이, 식량 자루, 빵, 돈, 여벌 내의 다섯 가지는 당시 여행자의 필수품이다. 사람 키보다 더 긴 지팡이는 강도나 뱀을 만날 때 무기로 사용되었다. 식량 자루는 오른쪽 어깨위에 가죽끈을 대고 가슴을 가로질러 왼쪽 엉덩이에 닿게 메고 다녔다(유디트 10,5; 13,10). 


빵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말은 여러 곳에 있다(마르코 6,8; 마태오 10,9-; 루카 10,4). 돈 에 대한 금지도 있었다(마르코 6,8; 마태오 10,9). 밤에 추위 때문에 속옷을 두 벌 껴입는 습관이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태오 10,10과 루카는 제자들이 속옷 두 벌을 소유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조언은 당시 그 어떤 다른 그룹에서 보기 어렵다. 예수 제자들은 보통 여행자보다 적게 가지고 다니라는 말이다. 예루살렘 순례객들의 화려한 성지순례 행장을 초대 공동체가 겨냥하고 비판하는 역할도 있다. 


그러니 제자들은 생존을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의지해야 했다(마태오 10,40-42; 25,34-40). 4절은 더 좋은 집과 더 좋은 음식을 위해 다른 집으로 옮겨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제자들은 안락한 주거생활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붓다가 걸인 종교를 창시했다면, 예수는 걸인 종교에 유랑 종교를 시작하였다.


5절은 루카 공동체 선교사들이 유랑 생활에서 겪은 쓰라린 추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선교에서 아무 반응이 없을 때도 있었다(마르코 6,11; 마태오 10,14). 그들을 재워줄 집도 찾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노숙자와 다를 바 없겠다. 그럴 때 상징적으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이다(느헤미야 5,13; 사도행전 13,51; 18,6). 


4-6절은 초대 공동체에서 방랑 선교사들의 삶을 그린 것 같다(사도행전 16,15; 18,3; 루카 10,11). 하느님 나라 선포의 다급함이 느껴진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 이전에 정말로 제자들을 파견했을까. 의견이 분분하다.  


오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적어도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예수의 열두 제자단은 예수 작품이다. 부활 이후 공동체에서 선교활동은 역사의 예수에게 근거한다. 초대 공동체 이전에 복음 선포에 나섰던 신앙의 선배들이 분명 있었다(코린토전서 9,4-14; 루카 22,35-).


불의에 저항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한 예언자 예수는 어느덧 그리스도교에서 제사 지내는 사제로 축소되어 버렸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오랫 동안 하느님 나라를 망각하고 살았다. 그저 우리는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집중하고 살았다. 서양 그리스도교 역사는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 망각의 역사다.


오늘 단락처럼 그리스도교에서 무시 당하는 성서구절이 어디 또 있을까.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마찬가지다. 제정신으로 오늘 단락을 편안하게 읽을 성직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화려한 주교관에서 사는 사람들은 고개를 들 면목이 없겠다. 지팡이를 금지하니 사제들은 골프채를 들고 있는가. 십자가는 들고 따르라 하니 골프채를 들고 예수를 따르는가. 현재 한국 주교들과 신부들의 생활방식은 전체적으로 보아 예수의 가르침과 거리가 한참 멀고 또 멀다. 


예수 이후 하느님에 대한 예배의 중심은 장소에서 사람으로 변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곧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 그리스도교는 이 점을 명심하고 크게 반성해야 한다. 장소로서 성당이나 교회 건물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다. 걸어다니는 성전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핵심은 성직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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