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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3 :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첫 번째 죽음 예고
  • 김근수
  • 등록 2016-08-16 10: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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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느 날,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시다가 곁에 있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합니까?” 하고 물으셨다. 19 그들이 “대개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마는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22 예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18-22) 




마르코 8,27-30; 마태오 16,13-20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중요한 베드로의 고백을 요한복음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루카는 마르코 6,45-8,26 부분을 송두리째 빼버렸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마르코에서는 베싸이다 소경 이야기 바로 뒤에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는 반면, 루카에는 오천명을 먹인 빵 이야기 뒤에 베드로 고백이 있다. 베싸이다 소경 이야기는 마르코에게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 마지막에 해당한다. 예수가 우리 눈을 열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마르코는 알려주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향하여 떠난 도중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였다(마르코 8,27). 마르코에게 베드로의 고백 장소를 밝히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예수 공생활을 드라마로 촬영한다면, 두 번째 방송 첫 장면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마르코복음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출발 시점에 있다. 루카에서 그 길과 관련이 있는 느낌이 마르코에서보다 적다. 


8절에서 군중은 마치 사라진 것 같다. 마을도 아니고 길도(마르코 8,27) 아니고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 루카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기도하다(루카 5,6; 6,12) 말고 제자들에게 묻는다. 다른 중요한 사건에서와 같이 평범하게 제자들에게 묻는다(루카 3,21; 6,12; 9,29).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주 질문하였다. 대화는 질문보다 훨씬 많았다. 


예수의 기도에서 특징은 무엇일까. 예수는 자주 기도하였고, 중요한 결단을 앞두고 기도했고, 꼭 혼자 기도했다. 예수는 왜 혼자서 기도했을까. 제자들과 함께 기도한 장면이 복음서에 없다. 물론 예수는 회당 예배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최후 만찬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소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예수에 대한 믿음 이야기는 많았지만 제자들의 그리스도 고백은 없었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이제까지 계속 지켜본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고(루카 5,1-11), 사도가 되었으며(루카 6,12-16), 베드로는 첫 제자가 되어 새 이름을 받았었다(루카 6,14). 제자들은 선교에 나섰고(루카 9,1-6), 빵 기적에서는 군중에게 봉사하였다(루카 9,10-17).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몰랐던 헤로데와 달리(루카 9,7-9), 제자들은 확실히 알아야 했다. 이제 그 차례다. 갈릴래아에서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이제까지 계속 지켜본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예수는 제자들 전부에게 물었는데, 베드로는 제자단 대표로서 고백한다. 베드로의 중요한 위치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민주적인 사고가 적었던 탓일까. 베드로는 20절에서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뜻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아에는 정치적 기대가 담겨 있는 호칭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이란 덧붙인 단어를 통해 루카는 예수와 하느님의 일치를 강조하고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메시아를 소개하려 했다. 


마르코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만 답했었다(마르코 8,29). 독자들은 예수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임을 이미 알고 있다(루카 2,26). 내가 사랑하는 아들(루카 3,22), 나자렛 설교와(루카 4,18) 오늘 이야기로 독자들은 예수를 서서히 알아왔다. 마르코에서 요한으로 갈수록 제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은 줄어들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초대 공동체 사람들에게 제자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소개하려는 성서 저자들의 의도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21절에서 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였다(루카 4,41; 8,56).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백성에게 퍼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십자가와 죽음에 이르러서야 예수가 생각하는 참된 메시아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마르코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했었다(마르코 3,11; 9,9). 루카는 그리스도임을 말하지 말라고 한다.(루카 4,41) 부활 사건까지는 침묵하라는 말이다.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침묵을 깬 사건은 ‘이스라엘의 온 백성’에게 알린 사도행전 2,36에서다. 


‘사람의 아들’은(루카 6,5; 7,34)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을 것이다. 예수를 죽인 주범이 누구인지 독자들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한 무리로 취급되었다(루카 19,47; 22,52; 사도행전 4,5). 22절 ‘사흘 만’은 부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승인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린토전서 15,4)와 일치한다. 


원로들과 대사제들은 로마군대와 손잡고 정치경제와 종교에서 권세를 누렸던 실력자들이다. 율법학자들은 정치경제와 종교에서 지배층에 봉사하는 어용 신학자들이다. 어용 신학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날뛰며 교회를 좀먹고 있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여론, 제자들의 고백에 이어 예수의 선언이 이어진다. 예수의 고백은 예루살렘에서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고할 때 예수의 심정은 어땠을까. 제자들은 또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 성서 독자들은 제자들보다 예수를 더 잘 이해할 위치에 있다. 부활 사건까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예수를 직접 만난 적 없지만 성서를 읽는 우리들이 예수를 직접 본 제자들보다 예수를 더 잘 알 입장에 있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 


성서를 이해하는 방법을 보는 사람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소개하고 싶다. 사건과 이야기를 따라 주제와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평론가의 입장이다. 예수와 제자들 입장에서 볼 수 있다. 저자 입장에서 책을 보는 방식이다. 예수의 지지자와 반대자가 누구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살피는 방법도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성서를 읽는 것이다. 세 번째 입장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주 접하지는 못한 방식이다. 


메시아 예수는 고난과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성서에 따라 이해될 것이다.(루카 24,19-27; 사도행전 2,29-36; 3,18) 부활은 예수가 유일하고 독특한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전제다.(루카 1,33)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을 요약하는 선언이다. 하느님나라 선포에아직 한 가지가 부족했다. 예수의 저항과 고난과 죽음이다. 그냥 죽음이 아니라 처형되는 죽음이다. 저항 끝에 오는 죽음이다. 예수는 병이나 나이로 자연사하지 않았다. 죽음 뿐 아니라 저항도 보아야 한다. 그것을 제자들은 독자들은 보아야 한다.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것이다. 예루살렘 가는 길은 여행의 길이 아니라 항쟁의 길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로 당당하게 고백했지만, 실제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닫게 되는 계기는 따로 있었다. 베드로가 믿음의 눈을 뜨는 데 세 가지가 필요했다. 눈물(루카 22,62), 회개(루카 22,32), 예수 부활(루카 24,34). 어찌 베드로에게만 눈물, 회개, 그리고 예수 부활이 필요할까. 울어라 인간이여, 뉘우쳐라 인간이여, 보아라, 예수 부활을. 그러면 예수는 메시아임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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