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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4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 김근수
  • 등록 2016-08-23 10: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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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24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입니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27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습니다.” (루카 9,23-27)

 


루카복음에서 9,23-27은 들판 설교(6,20-49), 비유 말씀(루카 8,4-21), 선교 설교(루카 9,3-5)에 이어 예수의 네 번째 설교라고 부를 수 있다. 다섯 구절로 이루어진 권고 말씀이다. 루카는 마르코 8,34-9,1을 참조하고 조금 고쳤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은 23절에서 제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patibulum 루카 23,26) 몸소 지는 것, 그리고 그 기둥을 어깨에 지고 예수 뒤를 따라가는 것 두 가지가 포함되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이 연결되고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 이외의 고대 어느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23절 ‘매일’은 루카복음에서만 덧붙여졌다.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순교하는 모습을 가리킨다.(코린토전서 15,31; 코린토후서 4,10; 로마서 8,36) 24절에서 예수는 경제 분야의 언어를 사용하여 목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루카복음 저자는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복음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구절인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마르코 8,37)를 삭제하였다.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루카 5,11) 예수를 따름은 다른 그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림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를 우리가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자주 망각하곤 하였다.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루카 23,26) 키레네 사람 시몬을 인용하는 것은 오늘 루카 본문과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27절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습니다”는 마르코복음에 없던 구절이다. 마태오는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다르게 표현했다. 루카는 하느님나라를, 마태오는 사람의 아들을 좀 더 강조하고 있다.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하느님나라 선포와 그리스도 선포를 연결하고 있다(사도행전 8,5; 19,8; 20,25).


마르코복음에서 예수의 첫 번째 수난 예고 직후 베드로가 예수를 말리고 다투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군요.” 하며 꾸짖었다”(마르코 8,32-33) 그러나 루카는 그 장면을 삭제해 버렸다. 스승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에게 난감하고 민망한 구절을 아예 없애버렸다.


목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는 돈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루카 6,20.24; 12,16-21).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돈이 얼마나 큰 장애물인지 예수는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 경고는 신도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에도 해당된다.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가톨릭교회가 예수를 따르는 데 크게 방해할 것이라는 뜻이다. 주교와 사제들은 가슴에 새길 말이다.


본문에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이 연결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고 예수를 따름도, 자기 자신을 죽이지만 예수를 따르지 않음도 예수의 권고와 거리가 아주 멀다.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체 하는 그리스도인들, 자기 자신을 죽이지만 예수를 따르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깊이 반성할 일이다.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은 같은 차원의 일이 아니다. 예수에 대한 책을 보고 감동하는 일이 예수를 아는 것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같은 길을 걷는 일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일이 예수를 아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만드는 잘못된 구조와 불의에 저항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고도, 예를 들어 독서와 영화로도, 얼마든지 예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희생하지 않으면 예수를 결코 따를 수 없다.


무병장수가 그리스도인의 희망인 것은 아니다. 예수와 연결된 삶이 그리스도인의 참 희망이다. 그것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순교 없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순교의 삶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많으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적다. 예수를 아는 그리스도인은 많으나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적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말 잘 듣는 착한 학생들처럼 다소곳이 있다. 예수의 죽음 예고라는 엄청난 소식 앞에 제자들은 충격 받지도 않고 잘 받아들이는 것일까. 마르코복음에서 요한복음으로 갈수록 제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은 줄어들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초대 공동체 사람들에게 제자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소개하려는 성서 저자들의 의도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는 실제 죽음을 뜻하기에 앞서, 죽기 이전에 부정적 이미지에 사로잡힘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에서 종북이라는 단어가 국가보안법으로 재판받아 처벌받기 이전에 여론재판으로 수모를 겪는다는 현실을 가리키듯이 말이다. 십자가는 실체 처형 이전에 이미지로 사람을 죽인다. 종북이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고대에는 그토록 두렵고 무서웠던 단어 ‘십자가’가 우리를 특징짓는 제일의 단어가 되었다. 십자가는 우리다. 우리는 십자가다.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이 반드시 바람직한 모습인 것은 아니다.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학생보다 질문하는 불손한 학생도 소중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그대로 믿고 따랐던 많은 학생들이 세월호에서 희생되었다. 순종과 침묵이 지배적인 문화는 위험할 수 있다. 토론이 활발하지 않고 평화로운 논의만 있는 곳도 마찬가지다. 자유와 해방이란 단어가 거의 들리지 않는 문화는 유익하지 않다. 가톨릭교회의 분위기는 어떤가. 마치 군대 같지 않는가.


군대와 교회는 같은 곳이 아니다. 군대 같은 교회라면 무언가 한참 잘못된 교회다. 맙소사, 우리 교회의 꿈이 군대였다는 말인가. 예수가 군대 같은 교회를 원했다는 말인가. 공동묘지의 숨 막히는 정적이 평화는 전혀 아니다. 시장바닥의 시끄러움이 사람 사는 세상에 보다 더 가깝다. 가톨릭에 치열한 논쟁은 있는가.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신자보다 질문하는 불손한 신자가 늘어나야 한다. 가톨릭은 지금보다 아주 많이 시끄러워져야 한다. 논쟁이 있어야 한다. 주교들도 신부들도 피 고인 자리에 자주 앉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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