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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5 : 예수의 변모
  • 김근수
  • 등록 2016-08-30 10:24:27
  • 수정 2016-08-30 10: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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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쯤 지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29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30 그러자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32 그 때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거기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떠나려 할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 34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뒤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버렸다.  

 35 이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36 그 소리가 그친 뒤에 보니 예수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기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루카 9,28-36) 




본문의 예수의 변모 이야기는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모습을 적절히 드러내주었지만,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어려움을 선사하고 있다. 변모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고, 사람이 되신 예수라는 교리를 이해하는데 방해되기 때문이다(Bovon, I 492).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루카는 오늘 변모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답하고 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예수의 죽음 예고와 십자가 추종은 오늘 본문과 내용적으로 이어져 있다. 예수의 죽음을 알아야만 예수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뜻이겠다. 


하느님의 영광이 루카 2,9 이후 처음으로 예수의 변모 사건에서 땅에(31절), 밤에(32절) 나타났다. 루카 3,22 이후 하느님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35절). 하느님 아들이라는 예수의 신분이 세 제자들에게 드러났다(36절).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예수의 길이exodos 처음으로 뚜렷하게 밝혀졌다(31절).


예수의 길과 함께 제자들의 길도 드러났다. 예수의 역사와 제자들의 역사는 얽힌다. 제자들의 역사는 예수에게 선택되고(루카 5,1-11), 예수 여정에 동참(루카 9,32)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을 보았고(루카 9,32),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았다(루카 9,35). 그러나 32절에서 잠들었던 제자들은 예수의 역사를 아직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다. 부활 이후에야 제자들은 예수를 온전히 알게 된다(루카 24, 26. 44-48; 사도행전 2,14-). 


‘엿새 후’(마르코 9,2)에서 왜 ‘여드레쯤 지나서’로(루카 9,28) 변했는지 누구도 설득력있는 해설을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다. 28절 ‘여드레쯤 지나서’는 할례(창세기 17,12), 유다교의 초막절에서 ‘팔일째 되는 날’ (레위 23,36) 또는 초대 공동체에서 ‘여드레 뒤’를 (요한 20,26) 가리킬 수 있다. 어쨌든 예수를 기념한다는 뜻이겠다. 28절 ‘제자 셋’은(탈출기 24,1) 루카 8,51에서 다시 언급된다. 루카는 요한을 베드로 뒤에 두 번째 자리에 종종 놓는다(루카 8,51; 사도행전 4,13; 8,14). 루카는 야고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사도행전 12,2). 


28절 산은 4세기 예루살렘의 치릴루스에 의해 처음으로 타보르 산으로 여겨졌다고(베드로후서 1,18, 거룩한 산) 한다(Wolter, 352). 루카에서 산은 언제나 예수의 기도 장소로 소개되었다(루카 6,12; 22,39). 루카 6,12에 이어 예수의 두 번째 ‘산상기도’가 오늘 본문에 나온다(H. Conzelmann, Mitte der Zeit, 51). 마지막 산상기도는 올리브산에서의 기도다(루카 22,39-46). 나자렛 산동네 총각 예수에게 산은 어디 기도에만 익숙한 곳일까. 외로움도 답답함도 그리움도 예수는 산에서 달랬을 것이다. 


29절에서 기도하는 예수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탈출기 34,29; 고린토후서 3,7). 마르코에서처럼 제자들 눈앞에서 모습이 변했다는 부분은 삭제되었다. 마르코 9,2에서 예수의 모습이 변한 것을 루카는 32절에서 예수의 얼굴이 변한 것으로 축소했다. 29절 prosopon은 얼굴 또는 몸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의 영광은doxa(루카 9,26; 21,27; 24,26) 예수 부활과 재림과 연결된다. 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하얀 색은 하느님 색이다(다니엘 7,9). 


왜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성서학자들은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모세와 엘리야는 묵시록 11,6을 제외하면 한 쌍의 인물로 함께 등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르코 9,4에서 구약성서 전체를 ‘율법과 예언서’에서 보는 관점에서 모세와 함께 시작되고 엘리야에서 끝난다는(말라키 3,23-) 사실을 강조하는 것일까? 루카에게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성경의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유다교 전승에서 하느님 곁에 있는 사람들로 여겨졌다(루카 24,4; 사도행전 1,10).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곧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33절에서 초막 셋 이야기는 영원한 집(루카 16,9) 또는 초막절을(즈가리야 14,16-21) 의식한 것 같다. 초막절은 유다인에게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광야을 떠돌던 시절을 기억하는 축제다. 유다인은 초막절에 일주간을 천막 안에서 생활한다. 초막(천막)은 유다교에서 신도들을 상징한다. 34절 구름은 하느님 거룩함의 상징이다(탈출기 24,15-18). 베드로가 한 말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를 어떤 내용으로 이해해야 하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제자단의 집단 반발로 해석하면 어떨까. 예루살렘 가는 예수의 길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예수의 노선과 제자들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충돌한 것이다. 이런 해석을 제시한 성서학자는 아직 없다. 


하느님이 나타나심은 초막절 천막을 필요없게 만들었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졌다(루카 1,12; 2,9; 5,9). 35절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느님 말씀은 시편 2,7, 이사야 42,1, 신명기 18,15가 섞인 것이다. 하느님은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로 택하셨다. 하느님은 예수 생각과 제자들 생각 사이에서 예수 편을 드셨다. 예수가 가는 길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다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길을 충실히 따르라는 뜻이다. 


35절에서 ‘내가 택한 아들’은 무슨 뜻일까.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서 하느님이 선택한 인물들을 예수는 훨씬 뛰어넘는다는 말을 루카는 예수 제자들과 복음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다. 모세(시편 106,23), 아론(시편 105,26), 다윗(시편 89,20-), 하느님의 종(이사야 43,10) 등 하느님이 뽑으신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하느님은 당신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유다교에서 아들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는 아니었다(J.A.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 802). 


36절에서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기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말은 마르코복음에 없던 내용이다. 제자들의 충격을 루카는 계속 잊지 않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루카는 마치 TV 생중계하듯 예수의 변모 사건을 사실 그대로 정확히 보도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마태 16,18; 갈라디아 1,16), 예수의 길이 어떤 것인지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수난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수난과 죽음 덕분에 예수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아들이며 하느님 뜻에 걸맞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예수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예수 변모 사건은 예수 부활에 못지 않은 막중한 의미를 가졌다. 사제도 왕도 아닌 예수,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나자렛 출신의 예수를 우리는 하느님의 마지막 결정적 계시로써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Bovon의 적절한 언급처럼, 예수 변모 사건은 예수가 이스라엘에서 왜 실패했느냐라는 쓰라린 물음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을 배경으로 탄생한 이야기다(Bovon, I 501). 


성서 독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은 성서를 보는 입장에서 똑같지는 않다. 제자들은 아직 복음서를 읽지 못했다. 독자들은 성서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의 눈에 제자들의 처신과 언행이 답답하고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제자들의 처지를 감안하고 성서를 읽으면 제자들의 심정이 좀더 가까이 이해될 수 있다. 21세기 한국 독자들과 이천년전 유다인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어찌 대화가 그리 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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