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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6 : 제자들의 이해 부족
  • 김근수
  • 등록 2016-09-06 10:26:08
  • 수정 2016-09-06 10: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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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다음날 예수의 일행은 산에서 내려와 큰 군중과 마주치게 되었다. 38 그 때 웬 사람이 군중 속에서 큰소리로 "선생님, 제 아들을 좀 보아주십시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입니다. 39   그 아이는 악령이 덮치기만 하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온몸에 상처를 입습니다만 악령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40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며 소리쳤다. 41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고 비뚤어졌을까요! 내가 언제까지나 여러분과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오시오." 하셨다. 42 그 아이가 예수께 오는 도중에도 악령이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발작을 일으켜놓았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악령을 꾸짖어 아이의 병을 고쳐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루카 9,37-42) 

  



앞 단락에 소개된 예수의 변모 사건이 밤에 일어났다는 것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다음날이라는 부사는 루카복음의 이부분에서만 나온다. 예수의 변모 사건에 곧바로 이어진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능력과 제자들의 무능이 대비되고 있다. 먼저 치유하고 그 다음 해설하는 순서로 전개되는 순서가 백인대장의 종을 고친 이야기를(루카 7,1-10) 닮았다. 


이미 예수는 열두 제자들에게 “모든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루카 9,1). 예수는 악령을 쫒아냈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제자들의 무능을 강조해서 예수의 능력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의 무능과 이해 부족은 성서 독자들과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예수의 경고이기도 하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9,14-27과 달리 루카복음에서 예수는 큰 군중과 마주치게 되었다.  군중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본문에서 소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복음서 저자들에게 아쉬움을 느낀다. 자세히 소개되지 않은 어떤 아빠가 마르코에서와 달리 큰소리로 예수에게 애원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에게만 기대할 수 있었던 일을 예수에게 청하고 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입니다” 외동딸을 둔 야이로도 같은 심정이었다(루카 8,42).


세월호 유가족들의 애원처럼 들리는 구절이 내 눈을 적시게 한다. 그 심정 오죽할까. 하느님도 예수도 슬피 우시겠다. 이천년전 이스라엘에서 자녀를 하나만 둔 경우는 드물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둔 아빠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들이 악령에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그 가족조차 사회에서 낙인이 찍혀 따돌림당한 것이다. 병자는 아파서 괴롭고 소외당해서 또 괴롭다. 그 고통을 견디어내고 예수에게 외친 아빠의 용기를 존경하고 싶다. 루카는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41절 예수의 불평은 제자들의 무능을 겨냥한 것인가?(Wolter, 358) 아니면 군중에게 향하고 있는가?(루카 7,31; 11,29; 신명기 32,5) 짜증을 내는 듯한 예수의 반응이 독자들을 당황하게 할지 모르겠다. 예수는 왜 불평했을까. 예수가 사람들 곁에 있을 시간이 이제 얼마 없다. 예수 없이 제자들이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데 무능하다. 


41절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는 적절한 번역일까? 그보다는 ‘애원을 듣는다, 돕다’가 좀더 어울리겠다. “언제까지나 제가 여러분의 애원을 다 듣고 도와야 합니까?” 정도가 어떨까.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는(루카 11,29; 신명기 32,5. 20) 예수의 능력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기적은 청하는 사람의 믿음에 크게 달려 있다(마르코 9,21-24). 기적을 보고서야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기적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기적을 자연과학 법칙과 연결하여 이해하려는 현대인들은 기적을 하느님의 은총과 연결하던 고대인들을 제대로 이해할지 모르겠다. 성서의 기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현대인은 고대인보다 유리하지 않은 처지에 있다. 


예수는 간청하는 아빠에게 ‘당신 탓이요’라고 꾸짖지 않았다. 당시 문화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말이다. 악령이 든 것은 자기 탓이라고 여겨졌었다. 43절에서 악령을 쫓은 부분이 간단하게 설명되는 것이 눈에 띈다. 예수는 악령을 쫓아내고 아들을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루카 7,15; 코린토전서 17,23). 하느님은 백성들과 경건한 개인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미신다(열왕기상 8,28; 토비트 3,3; 시편 12,4).


제자들은 악령을 쫓아내지 못했다.(열왕기하 4,31)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무능할 수 있다. 무능보다 더 나쁜 사례가 다음 단락에 등장한다. 무능한 교회도 있고 이웃을 훼방하는 교회도 있다.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고 비뚤어졌을까! 예수가 시대의 징표를 알아챈 것이다. 


‘이 세대’는 요나의 기적(루카 11,29), 예언자의 피(루카 11,49-51), 죽음 예고(루카 17,25)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 세대’는 예수가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다. 


‘이 세대’가 예수에게 시대의 징표였다면, 지금 시대의 징표는 무엇일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이 역사의 중심에 등장한 사실이 우리 시대의 징표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성서 해설이 먼저인가. 현실의 아픔을 느끼는 게 먼저인가. 성서를 보며 현실을 생각하고, 현실을 보며 성서를 떠올린다. 성서를 모르면 현실을 보는 눈에 공허함을 느낀다. 현실을 모르면 성서는 무의미하다. 


군중이 예수를 찾거나 기다리는 장면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루카 4,42; 6,17; 8,40; 9,11). 군중은 왜 예수를 찾았을까. 복음서 저자들이 군중에게 좀더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군중의 삶과 현실을 더 자세히 말해주면 어떨까. 복음서 저자들이 놓친 부분을 성서학자들이 채워야 한다. 


성서의 주인공은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다. 역사의 주인공도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 아닐까. 역사는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과 소통의 드라마 아닌가. 하느님이 인간을 선택하고 사랑한다는 진실을 설명하는 것이 신학이다.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사랑한다는 진실을 설명하는 것이 해방신학이다. 최초의 해방신학자는 하느님이요 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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