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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7 : 두 번째 죽음 예고
  • 김근수
  • 등록 2016-09-13 10:09:33
  • 수정 2016-09-13 10: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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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라마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놀라서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44 "여러분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시오. 사람의 아들은 머지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 말씀의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또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났다. 47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49 요한이 나서서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여러분을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마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9,43-50) 




마르코에서 서로 연결된, 그러나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두 사건을 루카는 한 군데 모았다. 두 가지 의도에서다. 첫째, 예수의 기적과 죽음 예고가 연결되고 있다. 단순히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던 기적들과 그 사정이 다르다. 위대한 예수가 비참하게 죽는다니 무슨 말인가. 예수의 영광과 죽음이 극적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예수의 능력과 제자들의 무능이 대조되고 있다. 예수는 죽음의 길을 꿋꿋이 걷는다. 제자들은 권력 다툼에 바쁘고 예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기도 한다. 


루카는 예수의 고난 예고에 대한 설명을 마르코보다 줄이고 제자들의 무능에 대한 언급을 늘렸다. 그래서 루카에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함께 다룬 부분은 두곳 밖에 없다(루카 9,22; 18,31-33). 44절 “명심해 두시오”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귀에 넣어두시오”다(탈출기 17,1).   


앞 단락에서 예수의 기적을 본 군중은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에(신명기 11,2; 예레미야 40,9; 루카 1,49) 감탄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다시 예고한다. 기막힌 반전이다. 예수의 길은 언제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제자들은 군중처럼 예수의 능력에 감탄한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 예고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자들에게 주는 예수의 훈계는 두 가지다. 제자들의 무능과 이해 부족이다. 


예수의 죽음 예고는 계속된다(루카 13,31; 17,25; 18,31).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은 제자들의 이해 부족 장면이다. 어찌 당시 제자들만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평생을 사제로 살아도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지 않던가. 


사람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나. 사람의 아들은 왜 넘겨지는가. 어떤 종류의 고난을 말하는가. 제자들은 이 주제 앞에서 넘어졌다.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깊이 고뇌하지도 않았다. 예수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슬픔이지만, 그 운명을 깊이 고뇌하지 않은 것이 사실 더 큰 슬픔이다. 


46절 말다툼dialogismos은 토론보다는 투쟁을 가리킨다. 누가 제자들보다 더 높으냐는 주제가 아니라 제자들 중에 누가 가장 높으냐는 주제다. 누가 성직자보다 더 높으냐는 주제로 평생 한번이라도 고뇌하는 성직자가 있기는 할까.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더 높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성직자들은 많고 또 많다. 


예수는 자신을 어린이와 동일시했다. 여기서 어린이는 순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없는 사람을 대표한다. 권력이 없는 어린이를 흔쾌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낮아지라고 말한다.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는 말은 세상 질서를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혁명적인 가르침이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명쾌하게 말한 사람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일단 쟁취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을 멋지게 속일 수 있는 처세술을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권력을 아예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권력 다툼에 바쁜 제자들의 모습이 어디 그때만의 일이던가. 출세를 향한 성직자들의 치열한 다툼은 가톨릭교회를 망가뜨리는 범인 중 하나였다. 그 다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성직자들의 욕심은 인류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 중 하나다. 출세 욕심이 많은 사람은 주교로 뽑지 말아야 한다고 프란치스코교황은 말했다.


교회는 세상 권력구조의 질서를 교회 안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부자와 권력자들이 교회 안에서 으스대면 안된다. 성직자들이 부자와 권력자들을 특별 대우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예수를 배신하는 길이다. 교회는 작은 자,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고 특별히 대우해야 한다. 세상 권력 질서가 뒤집어지는 곳이 곧 교회다. 


49절에서 그리스도교 대화와 일치에서 중요한 원칙을 엿볼 수 있겠다. 이웃 교회가 하는 옳은 일을 방해하지 말라.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깎아내리지 말라. 


예수의 활동은 제자들 범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예수 제자들만 예수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은 아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의 열두 제자들만 예수를 널리 전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여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의 매력에 감동받아 스스로 기쁘게 예수를 전하고 다녔다. 


교회만 예수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없는 수많은 개인에 의해, 이웃 종교에 의해, 성령의 오묘한 이끄심에 의해 세상 곳곳에서 예수의 일을 계속되고 있다. 교회가 하느님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교회를 지도하신다. 예수에 대한 독점권을 교회가 지니고 있다는 착각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어디 또 있을까. 교회가 겨울잠에 깊이 빠진 사이에도 예수의 일은 계속되고 있다. 


제자들은 무능하고 이해가 부족했다. 우리 자신은? 교회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회개는 우리 의무다. 회개하지 않는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제 자리에서 만족하는 교회는 곧 넘어진다. 회개의 길을 걷지 않는 교회는 넘어진다.


오늘 본문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에게 여러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성공과 고난 사이에서 교회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43-45)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는가?(46-48) 그리스도교 사이의 경쟁과 협조는 어떻게 할 것인가?(49-50)


크신 하느님이 스스로 낮아지는 모습을 루카는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란 뜻이다. 사람을 살리려고 하느님이 십자가에 스스로 올라가셨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십자가에 매달린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려주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의 일을 계속 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밖에서 구원은 없다(Extra pauperes nulla salus). 


하느님의 크심과 하느님의 작으심이 함께 나타난다. 위대하기에 작고, 작으니 위대하다.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의 낮아지심에도 있다. 하느님의 크심에 대한 우리의 감동은 크다. 그러나 하느님에 작으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묵상은 아직도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실패한 하느님, 낮아진 하느님, 침묵하는 하느님에서도 하느님의 계시는 계속되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느님을 묵상해 보자. 


내 스승인 해방신학자 소브리노는 그 대표작 ‘해방자 예수’에서 하느님의 작으심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으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인류에게 새롭게 알려주셨다. 승리자 하느님이 아니라 희생자 하느님으로 말이다. 희생자 하느님은 유다교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완전히 놀라운 새로운 사상이다. 희생자 하느님은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인류에게 제시한 새로운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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