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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8 : 예수의 예루살렘 여정 시작
  • 김근수
  • 등록 2016-09-20 1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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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은 길을 떠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하였으나 53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54 이것을 본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고 물었으나 55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고 나서 56 일행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 (루카 9,51-56) 



루카복음에서 여행기가(루카 9,51-19,27) 시작되는 단락이다. 루카복음에서 예수의 갈릴래아 이야기가 끝나고 예루살렘 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자세한 지명과 순서를 밝히지 않더라도,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루카는 계속 말하고 있다(9,51; 13,22; 17,11; 18,35). 그 첫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로써 루카에만 소개되고 있다. 


마르코는 예수 역사를 7주간의 여정으로 보고 주요한 다섯 장소를 차례대로 소개하였다. 광야, 갈릴래아 호수, 예루살렘 가는 길, 예루살렘 성전, 빈 무덤이다. 예루살렘 가는 길을 마치 양파 가운데처럼 양쪽에서 광야와 빈 무덤, 갈릴래아 호수와 예루살렘 성전이 대응하고 있다. 예루살렘 가는 길, 즉 예수를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 마르코가 독자들에게 말하려는 주제다. 


루카는 마태오처럼 마르코복음의 구조를 따라 예수의 갈릴래아 이야기(1,1-9,50), 예루살렘 가는 길(9,51-19,27), 예루살렘에서 최후(19,28-24,53) 예수의 삶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마르코와 마태오와 루카는 모두 예수의 역사를 3부작으로 구성한 것이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했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제자교육을 한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맞이한다. 갈릴래아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나라를 선포했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제자교육을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적대자들과 갈등 끝에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맞이한다. 각 부분마다 주제와 주인공과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마태오와 루카는 마르코의 기본 구조를 바탕으로 예수의 족보와 유년 시절 이야기 그리고 부활 후 발현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복음서 여기저기에 자신만의 고유한 전승을 끼워넣었다.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삭제하거나 조금씩 고쳤다. 마르코복음이 예수 역사의 원본이라면, 마태오와 루카는 수정 증보판이다. 


오늘 단락에서 루카복음의 새 부분이 시작된다는 의견에 성서학자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여행기가 어디서 끝나느냐에 대해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루카의 ‘여행기’는 19세기에 개신교 성서학자 슐라이어마허가 이름 붙였다. 여행기는 루카 이전에 생긴 자료를 루카가 수록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강했다. 그러나 루카가 독자적으로 만든 부분이라는 의견이 지금은 우세하다(Wolter, 365). 


루카의 여행기에는 여러 전승이 끼어들었다. 마르코에 없던 내용을 루카는 여기저기 수록하였다. 루카에만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특히 예수의 자비를 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하는 비유들이 있다. 제자들은 그 증인이다. 그래서 나의 루카복음 해설서를 ‘가난한 예수’라고 이름붙였다.


예수의 갈릴래아 시절 주인공은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다. 제자들은 조연배우였다. 주제는 하느님나라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주인공은 예수와 제자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조연배우다. 주제는 제자교육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던 치유와 기적은 크게 줄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51절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지자”는 예수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생겼음을 암시하고 있다. 범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하늘에 오르실 날은(루카 24,51; 사도행전 1,9;22) 예수가 지상을 떠날 날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라는 결단은 예수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예수가 따름을 가리키고 있다(루카 9,31). ‘마음을 정하시고’는 직역하면 ‘얼굴을 굳히고’라고 표현할 수 있다(이사야 50,6-7).


예수는 예루살렘을 혼자 가지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제자들과 함께 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주려고 한 것이다. 지금 우리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 가는 길을 걷고 있다. 거처를 구하고 준비하는 일이 제자들의 유일한 일은 아니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반드시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야 한다고 본문이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Conzelmann, Mitte der Zeit 58). 다른 길이 있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유다인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온전한 유대인으로 여겨지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유다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예루살렘에 간다는 말을 듣고 예수를 맞이하지 않았다. 고향 나자렛에서도 수모를 겪은 예수 아니던가(루카 4,16-30).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가 아니라 제자들의 오해가 본문에서 주제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시오.”(마태오 10,5) 루카 본문과 비교되는 구절이다. 마태오복음의 이 구절을 루카 공동체는 모르고 있다. 사마리아는 루카 공동체의 선교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사도행전 1,8; 8,4-8; 9,31). 루카 공동체와 마태오 공동체는 사정이 다르다. 루카는 마태오에 나타난 사마리아 선교 금지 부분을 정당화하거나 부드럽게 하려고 했을까.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마르코 1,20;; 3,17) 마치 심판관처럼 행세하고 있다.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열왕기하 1,10.12) 심판의 불을(창세기 19,24; 시편 140,11) 예수에게 제안하고 있다.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고 물은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무섭다. 예수의 제자들이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말이다. 십자군에서, 남미 대륙 정복에서, 해외 선교지에서 많은 가톨릭 선교사들도 제자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심정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교회의 심판 권리를 주장하며 하느님에게 버릇없이 대드는 교회 역사를 보는 것 같다. 제자들은 설교자이지 심판관이 아니다. 교회는 설교자이지 심판관이 아니다. 


폭력을 써서 예수를 선교한다? 국가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선교에 도움되는 정책을 가톨릭교회는 진즉 포기하였다. 선교를 위해 어떤 종류의 폭력이라도 쓰는 것은 안된다. 선교를 포기하더라도 폭력은 안된다. 언어폭력도 안된다. 거룩한 폭력? 종교가 그런 폭력을 주장하면 안된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가톨릭교회 아닌가. 예수는 국가폭력에 저항하고 폭력에 희생되었지만 폭력을 쓰지 않았다. 한국처럼 여러 종교가 있는 곳에서 종교폭력은 더더욱 안된다. 불의에 저항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하는 자세로 종교끼리 서로 돕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다.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은 실패로 끝났는가. 예수는 왜 예루살렘으로 향했을까. 예수는 왜 갈릴래아를 떠났을까. 예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질문이다. 이른바 예수의 ‘갈릴래아 위기’를 가리킨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기적을 행하고, 빵을 나누고,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것으로도 모자랐을까.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가 못마땅했을까. 예수는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무엇이 부족하다고 보았을까. 예수에게 실망했단 말인가.  


예수처럼 지극정성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해도 그들은 예수를 떠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까. 예수보다 훨씬 지극정성이 부족한 우리가, 가난하지 않은 교회가 과연 가난한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정성을 기울이면 교회가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우리 교만이요 교회의 착각일 것이다. 우리는 영영 가난한 사람들 마음을 얻을 수 없을지 모른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 마음을 한번도 얻을 수 없을지 모른다. 교회가 예수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교회가 그렇게 행동하는 날이 언젠가 오기는 올까. 


오늘 단락은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따른다. 예수는 죽음의 길을 피하지 않고 꿋꿋이 간다. 예수는 제자들의 오해에도 설득당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예수 가는 길을 제자들이 방해한 것이다. 제자들을 꾸짖은 예수에게서 교회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교회가 예수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가(루카 6,27; 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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