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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49 : 예수를 따르려면
  • 김근수
  • 등록 2016-09-27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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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예수의 일행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59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60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당신은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시오." 하셨다. 61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9,57-62) 





어찌 보면 루카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 아닐까. 예수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으로 성서신학은 만족할 수 없다. 성서신학은 예수 따르기를 우리에게 촉구한다. 예수의 매력을 알리고 예수 따르기를 격려하는 것이 성서신학의 목적이다.  


바로 앞단락 9,51-56에서 제자 보내기가 주제였다면, 이번 단락은 예수 따르기가 주제다. 앞 단락에서 제자들이 예수에 앞서 걸어갔다면, 이번에는 예수 뒤에서 걷는다. 예수는 예루살렘 가는 길에 제자들을 초대하였다. 세 가지 일화를 통해 예수를 따르는 자세는 드러난다. 모두 길에(en te hodo) 관계되고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사마리아에서 냉대 받은 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남자가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다. 그는 마태오 8,19에서 율법학자로 소개되었다. 마태오와 루카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질문한 사람이 예수의 답변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무척 마음이 괴로웠다”(루카 18,23)에는 질문자의 반응이 있다. 예루살렘 가는 길을 강조한 마르코를 마태오와 루카는 자세한 일화를 들어 응원하고 있다. 


여우와 새는 잘 곳이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루카 5,24) 그렇지 못하다는 예수의 답변은 비장하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예수는 자발적으로 실업자가 되고 떠돌이가 되었다. 예수는 빈민이요 노숙자요 실업자다. 예수는 세상적인 가치에서 안정을 찾지 않고 하느님에게 온전히 의지했다. 예수처럼 하느님에게 집중한 사람이 역사에 또 있을까.  


근동 지역에서 시신은 보통 사망 당일날 매장되었다. 장례를 치르는 다급한 의무를 간청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토라의 어떤 계명보다도 더 존중되는 의무에 속했다. 당시 관행을 크게 거스르는 예수의 답변이 나온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가족과 단절하라는 놀라운 말씀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루카 14,26) 마태오에 없던 예수의 설명이 60절에 뒤따른다. 예수를 따름은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루카 4,43; 10,9-11). 예수를 따르려던 사람들의 반응은 소개되고 있지 않다. 60절 예수의 답변은 성서학자들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세 번째 인물은 예수를 따르기 전에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려 한다(열왕기상 19,20). 엘리야는 제자에게 작별 인사를 허락하였다(열왕기상 19,20). 그러나 엘리사가 하느님께 부름받던 사정을 떠올리며, 예수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에 비유한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밭고랑을 제대로 낼 수 없고 넘어질 수도 있다. 가족과 제대로 단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알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 망가질 수 있다. 하느님 나라와 자기 자신에게 모두 방해된다는 뜻이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사기 위해 재산을 다 팔아 밭을 사는 사람처럼(마태오 13,44), 약삭빠른 재산 관리인처럼(루카 16,1-7) 하느님 나라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시간, 장소, 사람들의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오늘 이야기가 좀더 뚜렷해진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교육을 위한 소재로 루카가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부활 이전 상황을 참조하고 있지만, 부활 이후 교회에 깊은 울림을 주는 본문이다. 루카는 처음 두 소재를 예수어록(Q)에서 가져온 것 같다. 세 번째 소재는 예수어록에서 왔는지 루카 고유의 전승에서 왔는지 분명하지 않다.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제자 부르심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부르심은 너무 매력적이어서 감히 거역할 수 없다(마르코 1,16-20). 예수의 부르심은 그 얼마나 고맙고 흥분되는 일인가. 제자 부르심에는 강력한 요청이 반드시 뒤따른다(루카 9,57-62). 부르심이 매력적이기에 강력한 요청을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인다. 강력한 요청 때문에 부르심이 매력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하느님 나라가 기쁜 소식이기에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지 심판이 두려워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기쁨이기에 비로소 의무인 것이지 의무이기 때문에 기쁨인 것은 아니다. 


목수였던 예수가 농부의 일까지 자세히 아는 것이 사뭇 놀랍다. 잔꾀를 부리는 회계사와 부정직한 농부 이야기까지 예수는 세상사를 잘 알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여인들의 일상 세계, 어린이들의 놀이까지도 모르지 않는다. 사람 사는 각종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예수가 놀랍기만 하다. 사기꾼 이야기에서 어두움에 싸인 뒷골목 뒷담화까지 어찌 그리 잘 알고 있을까. 우리 시대 종교인과 신학자들은 예수처럼 세상살이를 잘 알고 있는가. 


당시 예수를 따름은 다음날 어디서 자는지 모르는 삶을 뜻했다. 오늘 상황은 어떤가. 신학교 시절부터 평생 가난을 모르고 노후와 미래가 보장된 삶이 있지 않는가. 그런 삶에서 예수를 제대로 따르는 비장함이 생길 수 있을까. 쟁기를 잡고 자꾸 뒤돌아보는 성직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둘 정도로 어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사제들이 골프장에서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있을까.  


예수를 따름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루카는 분명히 전해주었다.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따름은 예수 뒤를 걷는 일이고 예수의 삶과 같은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 예수를 따름은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 가는 저항과 죽음의 길을 걷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관계없는 예수 따르기는 없다. 해방신학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내 스승 Sobrino의 그리스도론은 한마디로 ‘예수 따르기’ 그리스도론이요 ‘하느님 나라’ 신학이다. 


예수를 아는 것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존경하는 사람을 꼭 따르진 않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을 존경한다는 사실이 아인슈타인을 따름을 뜻하진 않는다. 예수를 알고 존경하지만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아직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예수를 알 수 없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처음 한 말은 “나를 따르시오”였다(마르코 1,17). 나를 믿으라는 말도 아니고 나를 이해하라는 말도 아니었다. 누구나 예수를 따른다고 장담하지만 아무나 실제로 예수를 따르고 있지는 않다. 사실상 무신론자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가. 실제로 쉬는 신자에 불과한 성직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인간은 하느님에게 부르심을 이미 받았다. 그 부르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에게 주제다. 물론 그리스도인 모두 같은 정도의 치열함으로 불린 것은 아니겠다. 그런 사실이 우리를 철저한 예수 따르기에서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란 어떻게 예수를 따를까. 기쁘게 고뇌함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기쁨, 가난한 사람들, 길을 걷는다 등의 단어 말이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제주 올레길을 걷는다고 상상해 보자. 벌써 내 가슴은 뛴다. 예수와 함께 길을 걷는다니 얼마나 황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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