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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51 : 일흔두 제자와 예수의 고백
  • 김근수
  • 등록 2016-10-13 10: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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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일흔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18 예수께서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19 내가 여러분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해칠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20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21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22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23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24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도 여러분이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10,17-24)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마귀를 쫓아낸 17-20절 일흔두 제자의 보고는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21-22절에서 예수와 하느님 관계에 기초한 하느님 찬양이 이어진다(마태오 11,25-27). 복음서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칭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거의 유일한 구절이 나온다(마태 13,16-17). 루카는 제자들의 선교 역사를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사들에게 관심 있는 것도 아니다. 


제자들이 어디에서 얼마나 오래 활동했는지, 환영받았는지 거절당했는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제자들의 유일한 소식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일이었다. 마귀(17), 사탄(18), 원수(19), 악령들(20) 여러 이름으로 불러진다. 악의 세력은,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름과 조직과 행동 방식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다. 악의 세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살아가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아채야 한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가 최초로 보여준 능력은 마귀를 쫓은 일이었다(마르코 4,21-28).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낼 능력이 있었는지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구절이 앞에 있었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든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루카 9,1)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했지만 쫓아내지 못했다”(루카 9,40) 그동안 마귀들은 예수 앞에서 굴복했지만(루카 4,34. 41; 8,28), 이제는 예수의 이름 앞에서도 제자들에 의해 굴복한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예수의 고백은 무슨 뜻일까. 이사야 예언자가 바빌론 왕을 비꼬는 구절을 예수는 기억한 것 같다.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넘어지다니!”(이사야 14,12) 이 구절을 이사야 14,12와 연결하는 것을 반대하는 독일의 개신교 성서학자 Wolter에(Wolter, 385)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예수는 사탄의 종말을 노래하고 있다(요한묵시록 12,7-10). 하느님나라가 선포되고 가까이 왔으니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이 퇴장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 확장은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이 물러감을 뜻한다. 독재자들이 반드시 몰락한다는 사실을 예언자들은 끈질기게 말해왔다. 하느님은 독재자들을 멸망시킨다.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악의 세력이 패배한다는 진리를 보여주셨다. 이승만, 박정희의 몰락을 역사가 보여줄 것이다. 독재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에게 특혜를 받았던 한국천주교회 내 일부 인사들의 어두운 역사는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친일파가 물러나지 않고 있는데 민주주의가 왔다고 볼 수는 없다. 


제자들이 뱀과 전갈과 원수에게서 보호되는 모습을 예수는 시편을 인용하여 말한다(시편 91,13; 마르코 16,18 참고). 19절에서 뱀과 전갈은 초대 공동체가 있던 그리스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언급된 것 같다. 하느님에 속한다는 기쁨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다니엘 12,1; 필립비 4,3; 요한묵시록 3,5). 20절에서 루카는 하늘의 책 또는 생명의 책이란 공동성서(구약성서) 주제를 꺼내고 있다(탈출기 32,32-; 시편 69,29; 이사야 4,3).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는 성령을 받아(루카 1,41. 67) 기쁨에 넘쳐 말한다. 철부지 어린이들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세상 개념으로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은 당신 지혜와 능력을(이사야 29,14; 호세아 14,10) 보여주신 것이다. 제자들의 능력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마치 당신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을 우리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을 이제 우리가 책임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하느님 있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하느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22절은 요한복음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하느님 아버지요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아들이요 딸인 예수에게 맡겨주셨다(코린토전서 11,23; 요한복음 5,20; 10,30; 17,11). 하느님과 예수의 일치와 교감을 노래하고 있다. 하느님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주셨고, 예수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려주었다. 예수를 보면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주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예수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공관복음(마르코, 마태오, 루카복음) 주제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를 보여 주셨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예수 안에서 보여 주셨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러 구름 위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예수 안에서 지금 계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예수를 외면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23절에서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예수는 선언하였다. 마태오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구절을 덧붙였다(마태 13,16). 하느님나라를 보지 못한 예언자들과 왕들보다 하느님나라를 보고 듣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것이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싸우고 쫓아내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루카복음에는 두 종류의 제자 그룹이 있다. 이름이 언급된 제자들(루카 5,27-28; 6,12-16), 이름없는 제자들(루카 9,1-6; 9,57-62; 10,1-20). 12제자들은 이스라엘에 파견되었고 72제자들은 이방인에게 파견되었다. 루카는 초대 공동체에서 두 가지 방식의 선교를 목격한 것 같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두 선교계획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물론 앞 단락에서 72제자들이 이스라엘에 파견되긴 했지만 말이다. 


신앙에서 그리스도교에서 보는 것이 왜 얼마나 중요할까.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강조되는 보기, 판단, 행동이라는 세 순서가 있다. 제5차 남미주교회의 아파레시다문헌도 보기, 판단, 행동이라는 순서에 따라 작성되었다. 남미 대륙이 처한 역사 현실이 맨먼저 다루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도 마찬가지다. 가톨릭 교회의 위기가 맨먼저 설명되었다. 판단, 행동 이전에 먼저 보아야 한다.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고 행동하기 전에 먼저 우리 사는 역사와 현실을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똑같이 가톨릭신앙을 지녔지만, 왜 어떤 사람은 악의 세력에 협조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항할까. 신앙을 가진 목적과 의도가 각각 다를 수 있다. 정치 성향이 종교 가르침을 억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는 눈에서부터 그들은 서로 크게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을 정직하게 보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역사와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무지와 편견이 깨어지는 아픔을 견뎌야 한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고 희생되는 자세가 요구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바람직한 교육 순서는 무엇일까. 성서, 교리, 신심 차례 아닐까. 그런데 성서교육은 부실하다. 교리교육도 마찬가지다. 변변찮은 성서교육과 교리교육을 받고서도 그저 신심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순서도 틀렸고 비중도 틀렸다.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성서교육과 교리교육은 비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누구 책임일까.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성서공부 이전에 한국사 공부가 먼저 아닐까. 성서를 일기 전에 현실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임진왜란 이후 한국사를, 적어도 동학혁명 이후 현대사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와 성당에서 신학교에서 한국 현대사를 배우고 가르치면 어떨까. 설교자들도 설교에서 맨먼저 역사와 현실를 다루면 어떨까. 민족의 아픔과 운명을 제대로 아는 신앙인이 그립지 아니한가. 그리스도교는 민족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남의 나라 이스라엘 역사는 알고 내 민족 역사를 모른다면 말이 되는가. 역사를 모르면 성서도 알 수 없다. 역사 없이 종교 없다.   


1989년 군대의 총에 맞아 순교한 남미 엘살바도르의 해방신학자 이냐시오 에야쿠리아가 생각난다. 그는 현실을 보는 세 가지 순서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1. 잘못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2. 잘못된 현실이 마치 내 책임처럼 아프게 보아야 한다. 3. 잘못된 현실을 고치기 위해 희생될 각오를 하고 보아야 한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사람들은 좀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 앞에서 움츠릴 필요가 없다.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마귀를 예수가 쫓아내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도 예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않는가. 그러니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비굴하게 처신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당당히 맞서 싸울 용기가 중요하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싸우고 쫓아냄을 포함한다. 그러나 하느님나라 선포는 강조되었지만,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싸우고 쫓아냄이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나라 선포처럼 중요하다고 강조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잘못이다. 


해방신학은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싸우고 쫓아냄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싸우고 쫓아내지 않으면 사실상 하느님나라 선포를 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지만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싸우고 쫓아내지 않는 것은 말은 하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에 저항하고 싸웠다. 오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에 저항하고 싸우는 모습을 어서 회복해야 한다. 


해방신학은 설명하는 신학보다 싸우는 신학에 가깝다.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돕는 전통 신학과 조금 다르게 잘못된 세상을 고치려는 신학이다. 신학은 철학보다 이런 고백을 먼저 했어야 마땅했다. 그동안 철학은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철학의 목적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잘못된 세상을 바꾸는 것, 그것은 예수의 간절한 꿈이었다. 


네 복음서에서 예수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구약성서는 바로 이사야 예언서다. 절망을 선포한 예레미야 예언서는 네 복음서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희망을 선포한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가 즐겨 애용했다.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를 깊이 연구한 것 같다. 내 생각에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 전문가였다. 예수는 희망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절망과 싸웠다. 절망을 권고하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웠다. 희망은 거짓 위안과 힐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절망을 음흉하게 권고하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진짜 희망은 오지 않는다.


지금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한국사회와 교회를 살피고 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천사들은 하느님께 어떻게 보고할지 궁금하다. 하느님 보시기에 한국은 어떨까. 마음에 드실까. 지상 순례길을 떠나 하느님 앞에 선다면, 그래서 내 자신의 삶과 신앙에 대해 하느님이 듣고 싶어할 때, 나는 어떻게 말할까. 자랑스러울까 송구스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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