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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52 : 착한 사마리아 사람
  • 김근수
  • 등록 2016-10-20 10: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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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었습니까?" 하고 반문하셨다. 27"'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28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입니다. 그대로 실천하시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습니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습니다. 35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합니까?"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10,25-37)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두 질문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논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르치는 이야기다. 흔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말해지는 비유다. 그러나 착한이라는 형용사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주어를 수식하는 것으로 좁게 이해한다면, 이 비유가 너무 윤리적인 교훈에 그칠 위험도 있다. 사마리아 사람이 윤리적으로 착하다는 뜻보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착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르코처럼 상황 묘사가 있지도 않고, 예수의 속을 떠보려는 진지하지 않은 질문을 하는 율법교사를 루카는 등장시키고 있다. 성서교사가 아니라 율법교사가 질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율법교사는 하느님나라에 대해 묻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는다. 루카는 차라리 하느님나라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는게 낫지 않았을까. 그리스 사상과 문화에 영향받은 유다인의 흔적이 보이는 부분이다.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루카는 즐겨 한다.(루카 3,10; 12,14; 사도행전 16,30) 


영원한 생명이라는 개념을 묻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는 율법서의 내용을 되묻고 있다. 율법교사는 율법서를 잘 알고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왜 질문하느냐는 점잖은 타이름이다. 정답은 이미 구약성서에 있다. 26절에서 예수는 당신은 성서를 어떻게 읽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예수가 오늘 나에게 교회에게 묻는 듯하다. 부끄러운 마음에 내 얼굴이 붉어진다. 


율법교사는 탈출기 20,2를 들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요약하여 답하고 있다. 이웃사랑에 대한 레위기 19,18이 답변에 추가되었다. 이웃은 친구뿐(탈출기 32,27; 예레미아 23,35; 시편 38,12) 아니라 다른 사람(창세기 11,3; 탈출기 2,13; 레위기 19,11) 또는 이스라엘 땅에 사는 이방인도 포함되었다(레위기 19,34). 당신 이웃을 당신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 사랑의 정도를 말하기보다 이웃 사랑의 시급함을 가리킨다. 내가 깨달은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내 몸이 느끼듯이 당연하게 여기는 만큼 어서 하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구약성서의 두 계명 부분을 한데 묶은 경우는 신약성서에 여기 말고 없다. 바오로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레위기 19,18을 생각하여 보고 있다(로마서 13,8-10; 갈리디아 5,14). 행동보다 믿음을 더 강조했다고 흔히 오해되는 바오로도 사실은 행동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로마 14,10; 갈리디아 3,12; 코린토후서 5,10). 


예수는 율법교사의 답변을 칭찬하고 있다. “옳은 대답입니다. 그대로 실천하시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답을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답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주일학교에서 어지간한 진리는 우리 다 배웠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친 내용을 그리스도교가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그리스도교가 사람들에게 핀잔받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을 잘못 가르쳐서가 아니라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리 질문을 받은 예수는 역사적 사례를 들어 응답한다. 철학적 질문은 역사로 답변되어야 마땅하다는 암시일까. 단어를 정의하기 좋아하는 그리스 사상과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 좋아하는 유다 사상이 대조적이다. 그리스도교는 철학보다 역사에 가깝다. 그동안 서양신학의 역사는 철학과잉이요 역사빈곤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6-28절에서 신명기 6,5, 레위기 19,18을 인용하는 예수는 충실한 유다교 평신도다. 예수는 유다교를 개혁하려 나섰던 것일까. 예수는 유다교 사제들과 친하지 않았고 거의 접촉이 없었다. 오히려 예수는 유다교 지배층 사제들에게 미움받아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가장 종교적이었던 예수가 가장 종교적임을 자처하던 종교인들에게 미움받은 것이다. 종교인들은 종교인들을 싫어하는가. 


다시 율법교사는 예수에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는 이웃이 누구인지 개념적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예수는 교리라는 내용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방법을pos 함께 다루고 있다. 그 장면에서 주체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예수는 강조하는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도 소중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29절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학자의 그리스어 질문은 ‘누가 내게 가깝습니까’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Plesion을 형용사로 보느냐 부사로 보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 


예루살렘은 예리고에서 약 27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유다 사막이 있다. 1990년 7월 뜨거운 태양 아래 나는 독일인 친구들과 그 사막길을 걸었다. 해발 760미터 산 위에 위치한 예루살렘에 비해 해발 240미터 아래 분지에 있는 예리고는 무려 1,000미터 고도 차이가 난다. 예리고는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도시다. 30절 강도를 로마군대에 저항한 유다인 독립군으로 추측하는 성서학자도 있다. 그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사제와 레위라는 직업종교인들은 강도 당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재산뿐 아니라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강도 당한 사람을 끝까지 돌보아주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교회 역사에서 예수의 자비로운 모습을 설명하는데 즐겨 사용되었다.  


사제와 레위를 함께 언급하는 경우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요한복음 1,19와 루카복음 이곳 외에 전혀 없다. 독자들은 예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부정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를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가 아니라 사제와 레위가 언급되고 있는 사실이 중요하다. 종교적 의무를 핑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직업 종교인들을 예수는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웃사랑을 역설했지만 그에 앞서 이웃 개념을 넓혔다. 예수가 이웃사랑을 강조한 사실은 그리스도교에서 자주 말해졌다. 그러나 예수가 이웃 개념을 확장했던 사실은 세상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기주의를 넘어선 이웃사랑에 감동하기 이전에 옹졸한 이웃 개념을 먼저 극복해야 하겠다. 생각을 바꾸고 넓히지 않으면,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선행도 때로는 이웃에게 불쾌함을 줄 수도 있다. 


예수의 관찰력과 관심이 놀랍다. 예수는 세상살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여자와 어린이의 세계, 실업자와 범죄자 심지어 사기꾼의 세계까지 훤히 아는 것 같다. 독립투사들의 아픈 삶도 잘 알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를 통해 복권시킨 예수가 놀랍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품위를 예수는 다시 찾아준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을 당연히 무시하고 차별하던 유다인 동족에게 예수는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종교적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우리는 아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소외시키는데 협조해온 사실을 마땅히 사과해야 한다고 아르메니아 방문길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기내 회견에서 밝혔다. 


논쟁은 왜 하는 것일까. 이기기 위해서? 진짜 논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의견을 찾기 위해 하는게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의견을 발견하면 자기 의견을 흔쾌히 포기하는게 토론에서 바람직한 자세 아닐까.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을 듣고 예수는 자기 의견을 깨끗이 포기한 적 있었다(마르코 7,29).


중요한 단어의 개념 정의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는 사례는 많다. 중요한 토론은 시작하지도 못한 채 개념 정의에서 머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논의를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개념 정의를 계속하는 사례도 있다. 나쁜 의도에서 교묘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해방신학의 주장을 훼손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난의 기준은 무엇인가 등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어용신학자들이 많았다. 그런 가짜 신학자들에게 성철 스님 기념우표에 등장한 말씀을 전해주고 싶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


오늘 단락은 적어도 네 가지 화두를 주고 있다. 


1. 자기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이웃 사랑은 둘째 치고 자기 사랑도 어려운 세상이다. 자기 사랑이라도 하는게 쉽지 않은 세상이다.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심리학자들의 설명이 특히 요청되는 분야겠다. 어렸을 때 사랑받은 경험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불행한 가족 역사가 개인과 사회의 사랑 능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슬픈 사회와 악한 사회가 자기를 사랑하는 개인의 능력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2.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마땅히 사랑하라.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지만 이웃 사랑도 하라는 말이다. 이웃 사랑도 쉽지 않다. 이웃 사랑의 마음이 충분히 있다 해도 이웃 사랑의 방식이 잘못될 수도 있다. 좋은 의도가 좋은 방식을 보장하지 않는다. 


3.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중에 어디서 먼저 출발해야 하나. 불교식으로 자기 사랑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이웃 사랑에 나서야 하는가. 이웃 사랑을 하면서 자기 사랑을 비로소 깨닫는 반대 순서를 추천해야 하는가. 곤혹스런 주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정비례로 커진다는 사실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그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4. 믿음과 행동의 관계는 어떤가. 잘못 믿으면 나쁜 행동이 나올 수 있다. 잘못 믿을 때 생가는 위험을 오늘도 교회 안팎에서 자주 보인다. 교회는 올바른 믿음을 가르치고 격려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잘 알면 곧 행동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되는가. 그렇지 않은 사례 역시 오늘도 교회 안팎에 있다. 믿음은 기쁜데 행동은 두려울 수 있다. 행동은 작게 믿음은 크게-그것이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선택인지 모르겠다. 올바른 믿음보다 올바른 실천이 더 중요하다. 행동없는 믿음은 아직 믿음이 아니다. 


예수는 왜 사마리아 사람을 선행의 모범으로 제시한 것일까. 종교적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예수는 동족인 유다인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종교적 이유로 유다인들에게 오랫동안 차별받아왔다. 유다인 앞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는 것 자체가 유다인에게 모욕으로 여겨졌다. 예수는 그 금기를 깨트린 것이다. 1980년대에 예수가 영남 사람들 앞에서 착한 호남사람 비유를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듣는 사람들 기분이 우선 어떻겠는가. 


예수 시대 이스라엘에 왜 강도가 많았을까. 세금이 무서워 도망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킬까. 로마군대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게릴라들을 가리키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담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라는 슬픈 배경을 상상해본다. 종교 차별이 인종 차별로 이어진 아픈 하나의 사례가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오늘도 세계 여기저기에 그런 경우가 보인다. 종교 차별도 잘못인데 인종 차별까지 하다니 말이다. 오늘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온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일까. 오늘 질문과 비유의 핵심이다. 나는 누구에게 이웃인가라는 주제가 주어졌다.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란 주제가 그리스도교에서 우선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라는 뜻이겠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교회가 살려고 하면 교회는 죽는다. 교회가 죽으려 하면 교회는 살 수 있다.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는 직업 종교인의 대표로,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의 대표로 대조되고 있다. 사제와 사마리아 사람 중에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 전례에 성사에 온갖 사목에 열중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사제는 문제투성이 사제일 뿐이다. 교리를 모르고 성서를 잘 모른다 하여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이미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 전례나 성사보다 이웃사랑 실천이 훨씬 중요하다(호세아 6,6; 미가 6,6-8; 로마서 12,1-2). 


가톨릭신자들에게 물어보자. 누가 우리 이웃인가. 나는 누구에게 이웃인가. 같은 천주교 신자가 내 이웃인가. 정치적 신념을 함께 하는 사람이 이웃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이웃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웃인가. 성당에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 중에 가짜 그리스도인은 적지 않지만, 거리에서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는 사람 중에 가짜 그리스도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무신론자에 불과한 성직자들도 있고, 사실상 그리스도인에 다름없는 무신론자도 많다. 행동하지 않는 직업종교인,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체 하는 직업종교인이 한국에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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