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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53 : 마르타와 마리아
  • 김근수
  • 등록 2016-11-03 09: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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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39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루카 10,38-42) 


앞 단락을 보충하는 일화가 이어진다. 오늘 단락의 일화는 루카에만 있다. 문체상으로 자캐오 이야기를 닮았고(루카 19,1-10), 내용적으로 코린토전서 7,32-35와 비슷하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루카 10,1-37과 멀리 떨어져 있다. 동행자, 길, 장소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베타니아는 아니다(요한 11,1; 12,1).




언니 마르타와 여동생 마리아 이야기는 복음서 여러 군데 나온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서로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마르타는 예수를 마중 나갔는데 마리아는 집안에 있었다(요한 11,19-21). 마르타는 식탁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다(요한 12,23). 같은 전승이 배경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Bovon, 3/2 103). 루카복음처럼 요한복음에서도 시골에서(요한 11,1.30), 집에서(요한 11,11) 마르타와 마리아가 등장한다. 루카가 모르는 나자로가 중심인물로 소개된다. 

 

마르타라는 여인이 예수 일행을 식사에 초대한 것 같다. 마르타는 여러 사람을 식사에 초대할 정도로 재산이 있는 여인인가. 여인이 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유다교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스 문화에서 여성의 지위는 유다교보다 좀더 존중받았다. 루카는 예수 시대 상황을 마치 루카 시대 상황처럼 설정하고 있다. 리디아가 바오로를 초대한 것처럼(사도행전 16,15), 마르타가 예수를 자기 집에 초대하는 것이다. 집은 초대 공동체의 가정교회를 연상케 한다. 


마르타는 주인공으로 소개되어 예수와 직접 대화한다. 마리아는 조연배우 정도로 설명되었다. 마리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스승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충실한 학생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루카 8,35; 사도행전 22,3; 열왕기하 4,38). 성서학자 마리아? 여성사제 마리아? 마리아는 예수 가까이에 앉아 말씀을 듣는 장면은 당시 유다교사회에서 파격적인 일이다. 예수가 어떤 말씀을 했는지 루카는 전해주지 않는다. 여성 제자를 둔 예수의 모습을 루카는 소개하는 것이다. 유다교 랍비들은 여성을 제자로 허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말에 마르타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루카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많은 일을 걱정하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인 이유를 예수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마리아가 예수 말씀을 듣는 것을 마르타가 불평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마리아가 언니 혼자monen 일하도록 내버려둔 것에 불평하고 있다. 마르타는 직접 여동생을 꾸짖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마리아의 행동이 옳은지 마르타는 예수에게 물었을 뿐이다. 


루카는 마리아와 예수 사이 일을 말하는게 아니라 마리아와 마르타 사이 일을 언급한 것이다. 마르타가 일하는 동안 마리아가 예수 곁에 앉아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마르타는 예수가 집안에 들어오기 전과 후에 똑같이 자기 일과를 실행하였고, 마리아는 선택한 행동이 달라졌다. 


예수를 집에 초대한 마르타는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하였다. 예수를 초대해 놓고 식사 준비와 시중을 소홀히 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민망한 처신이었을 것이다. 마르타는 훌륭히 행동하였다. 다만 예수의 친절한 해설을 듣고 마르타는 한 가지 더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의 말씀에 집중하는 일이 그 때에 걸맞았고 좀더 중요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니의 희생 덕분에 자기가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마리아는 언니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예수는 마르타의 식사 준비에 감사했고 마리아의 선택에 감탄했을 것이다. 


예수가 마르타의 시중드는 행동을 무시하거나 비판한 것은 아니다. 시중드는 일을 많은 다른 일과 비교해서 중요한 우선 순위를 분별한 것이다. 성서공부가 봉사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성서공부와 식탁봉사를diakonein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루카는 듣기와 식탁 봉사를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와 걱정하기를merimna 대조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르타는 너무 많은pollen 일과 적절한 일 사이를 식별해야 했었다. 그런데, 듣기와 식탁 봉사가 대조되는 것처럼 자주 오해되기도 했다. 아직도 그렇게 잘못 설명하는 설교자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마리아와 마르타를 두 유형의 다른 인간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오늘 단락에서 주인공은 누구인가. 예수에게 좀더 초점을 두어야 하는가,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더 관심을 두어도 되는가. 마르타처럼 여성들도 남성들과 다르지 않게 예수를 초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주제는 남녀평등인가. 마르타처럼 봉사하는 직분을 가톨릭교회에 도입하자는 생각을 여기서 이끌어내어도 좋을까. 또는 마리아처럼 여성도 남성들과 똑같이 말씀에 집중하는게 옳은가. 


오늘 단락에서 주인공은 두 여인이 아니라 예수인 것 같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다룬게 아니라 예수를 만났을 때 두 여인의 서로 다른 반응과 태도를 루카는 소개하는 것이다. 예수에게 봉사하는 자세나 예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나 모두 훌륭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먹고, 말씀을 들을 때는 듣는다. 봉사하는 사람의 희생 덕택에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고,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봉사의 의미가 더 깊은 것이다. 예수는 마르타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조언하였다. 예수의 조언에서 실천과 활동을 무시하고 격하하는 어떤 종류의 설명도 이끌어낼 수 없다. 행동 없는 예수는 상상할 수도 없다. 


마르타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고 희생적인 선의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신경쓰고 걱정하였다. 그래서 중요한 본질을 안타깝게도 잠시 잊은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즐겨 지적한 영적 세속성의 한 사례로 보아도 좋겠다. 영적 세속성은 마르타뿐 아니라 오늘 많은 성직자들과 교회 자신에게 일상적인 위험이 되고 있다. 마리아가 택한 몫은meris 예수의 존재에 집중하고 예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직분보다는 믿음의 두 유형으로 주로 해설되었다. 초대 교부 오리게네스는 활동과vita activa(praxis) 관상으로vida contemplativa(teoria)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마르타를 활동가의 전형으로 마리아를 관상 수도자의 대표로 본 해설은 본문의 의도와 별로 관계없다. 


예수와 두 여인. 이 단락에 나타난 두 여인의 자세에서 오늘 여성들은 할 말이 아주 많다.  마르타에서 봉사 직분에 대한 여성의 역할을 보고, 마리아에서 말씀 직분을 연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마르타에서 여성부제직을, 마리아에서 여성사제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그런 연결을 곧장 이끌어내긴 어렵다 할지라도, 여성들의 의견을 남성들과 가톨릭교회는 진지하게 들어야 하겠다. 여성에게 거의 자리를 주지 않았던 고대 종교와 아주 다른 장면을 루카는 보여주고 있다. 


오늘 이야기에서 무엇을 배울까.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잘 식별해야 하겠다. 예수에게 봉사하기 전에 예수 말씀을 들어야 하겠다. 행동이 말씀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행동하기 전에 예수 말씀에 집중하여 행동을 준비하라는 뜻이겠다. 여성을 존중한 예수의 놀라운 태도에서 가톨릭교회는 배울 것이 여전히 많다. 성서를 공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를 우리는 또 배울 수 있겠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을 오늘 교회는 택하고 있는가. 예수의 존재에 집중하고 예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을 택하고 있는가. 성서공부에 열중하는 본당이 많이 있는가. 여러 일과 사업에 신경 쓰느라 교회는 본당은 성서에 소홀히 하고 있지 않는가. 사업가로서 주교와 신부는 많지만 성서교사로서 주교와 신부는 많은가. 오늘 한국 가톨릭교회에 걱정 많은 마르타는 흔히 보이지만, 마리아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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