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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54 : 주의 기도
  • 김근수
  • 등록 2016-11-10 10:47:27
  • 수정 2016-11-10 10: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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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하루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 하나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이렇게 하시오.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1-4)   




기도에 대한 설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루카도 성서학자도 모르지 않는다. 기도에 대한 해설보다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먼저다. 그런 뜻에서 초대교회는 교리교육을 십계명, 주의 기도, 사도신경을 해설하는 것을 교리교육의 핵심으로 여겼다. 그 모범이 루카였다. 루카는 11장에서 주의 기도(11,1-4), 진짜 기도(11,5-8), 기도 격려 등(19-13) 기도에 대해 세 단락을 연속하여 배치했다. 


예수는 자주 기도하였다(루카 3,21; 5,16; 6,12).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간청한 사실은(시편 142,10; 마태오 28,20) 예수의 기도가 세례자 요한 등 다른 기도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요한 그룹에서 공동체 기도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기도가 어떤 내용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루카는 요한 제자들의 기도를 언급한 바 있었다(루카 5,33).


마태오 6,7-9에도 주의 기도가 있다. 마태오는 산상수훈의 맥락에서 예수의 기도를 소개하였지만 루카는 산상수훈과 관계없이 따로 적었다. 두 기도 모두 아람어로 전승되다가 그리스어로 작성된 것 같다. 아람어로 된 주의 기도가 히브리어 주의 기도보다 먼저 생긴 것 같다. 경건한 유다인은 히브리어로 기도했지만, 아람어로 된 기도도 있었다. 루카가 소개한 예수의 기도는 우선 청원 기도다.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다섯 문장으로 이뤄진 기도다. 예수는 기도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지 않고 기도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다. 루카 공동체에서 미사전례에 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기도로 여겨진다. 


주의 기도는 마태오와 루카만 전하고 있다. 루카는 주의 기도가 나온 배경을 설명하지만 마태오는 “이렇게 기도하시오”(마태오 6,9) 하고 말할 뿐이다. 기도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마태오 6,9) 루카에서 아버지로(11,2) 줄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오 6,10) 루카에는 없다. 마태오가 오늘(마태오 6,11) 먹을 빵을 청했다면, 루카는 날마다 청했다. 마태오가 잘못을(마태오 6,12) 언급하고, 루카는 죄를 말했다. 잘못은 여러 의미가 겹친 단어인 까닭에 루카는 죄라는 종교적 단어를 선택한 것 같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는 루카에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로 줄었다. 루카가 기도의 본질에 더 충실하다. 


예수는 주의 기도를 몰랐으며 마태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Goulder 같은 학자도 있다. 성서학자 Bovon은 루카는 마태오의 주의 기도를 몰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Bovon, 3/2 120). 예수의 기도는 당시 기도들과 비교하면 아주 짧다. 어려운 단어도 없다.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다섯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2절에서 하느님은 2인칭 단수에게 부르는 친근한 호칭으로 기도를 듣는 분이다. 3절에서 1인칭 복수가 기도하는 주체다. 하느님을 소유격 없이 그냥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는 유다교에 드물었다. 


예수 당시 히브리어나 아람어 문헌에서 하느님을 소유격 없는 아버지로 부르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2절 아버지는(마르코 14,36; 루카 10,21; 23,34)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 기도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호칭이다(갈라디아 4,6; 로마 8,15). 하느님을 가까이 느끼고 존중하는 뜻이 담겨 있다(마르코 14,36; 루카 10,21;요한 11,41). 신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는 고대 이방인 문헌에도 보인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습에 남성신학자인 나는 우선 멈칫거린다. 내가 남성이란 사실자체가 우리 시대에 제대로 신학하는 데 부정적 요소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 정도로 신학은 남성에 의해 심하게 독점되고 오염되어 왔다. 남성인 나는 죄송한 마음으로 신학해야 한다. 당연히 여성신학자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대목에서 불쾌함을 느낀다. 하느님을 어머니라고도 당당히 불러야 마땅하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왜 부족한지 깊이 깨달아야 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남자에 비유했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버지라는 단어에서 안정감, 권위뿐 아니라 사랑이 연상되었다. 뒤틀린 아버지 이미지나 경험을 가진 우리 시대 사람들은 아버지라는 단어에서 올바른 하느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단어에서 독재자의 모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히틀러, 박정희도 아버지 아니었던가. 잘못된 가부장적 독재적인 남성 이미지를 하느님에게 투사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긍정적인 아버지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 못지 않게 부정적인 아버지 이미지를 벗겨내야 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로마 2,24; 이사야 29,23; 52,5). 하느님의 거룩함은 하느님 자신을 통해서도(에제키엘 36,22),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도 응답되고 보존된다.(이사야 29,23; 시편 99,3)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주체가 하느님인지 사람인지 자주 논의되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도록, 하느님의 하느님다움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하느님께 비는 것이다. 


“야훼는 시온에서 위대하시고 만백성 위에 우뚝 솟으신 분, 만백성이 그의 높고 두려운 이름을 찬양하리니, 그분은 거룩하시다.”(시편 99,2-3) 


예수에게 아주 중요한 하느님나라는(루카 4,42-44)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로 표현되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는erkesthai 오직 공관복음만(마르코, 마태오, 루카) 전해주고 있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나라는 결국 하느님께 달려 있고 하느님의 선물로 다가온다. 


3절에서 epiousios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까. 1. 명사 ousia에 기초한 단어로 본다면, epiousios는 실체를 넘어선, 즉 ‘하늘의 빵’을 가리킨다. 2. einia의 여성 1인칭 현재분사에 기초한다면, ‘오늘’을 뜻할 수 있다. 3. 다가오다는 뜻의 동사 epienai를 기초로 ‘다음날’을 뜻할 수 있다(사도행전 7,26; 16,11;20,15).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3번 다음날을 선택하고 있다. 내일 빵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이 담겨 있다. 


빵은 ‘날마다’, 다음날에도 역시 필요하다. 예수의 기도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먼저 의식하고 있다. 마태오는 ‘오늘’ 빵이 필요하다고 말했었다(마태 6,11). 루카의 의도는 분명하다. 내일 식량이 중단되지 않고 굶지 않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평생 먹을 것이 마련된 부자들은 예수의 기도를 제대로 깨닫고 헤아릴 수 있을까. 결국 예수의 기도는 인간의 일상생활로 깊이 들어온다. 빵 문제도 하느님께 의지한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살아남게 하신다(시편 104, 14; 136, 25; 145,15). 인류는 아직도 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1인칭 복수 우리가 기도 주체로 나오는 4절 기도는 다시 유다인의 기도 전통에 이어져 있다. 유다인이 날마다 바치던 18기도의 6번째 기도는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 우리를 용서하소서”이다. 개인적인 용서 청원은 이미 구약성서에 있었다(탈출기 34,9; 시편 25,11; 호세아 14,3).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이웃에게 용서를 거부할 수 없다. 신약성서에서 특히 마태오 18,23-35에서(마르코 11,25; 골로사이 3,13) 이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유혹은 예수에게 친숙한 경험이다(루카 4,13). 예수는 평생 유혹에 시달리며 싸우며 살았다. 제자들도 그럴 것이다(루카 8,13; 22,31). 자신의 약함을 아는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peirasmos는 악으로 유혹이 아니라 고통과 번민 중에도 하느님에 대한 충실함을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시험하는 것을 가리킨다(사도행전 20,19; 야고보 1,2; 베드로후서 2,9). 이 부분을 예수는 겟세마니 언덕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부탁했었다.(마르코 14,39; 루카 22,40) 하느님께서 손수 그 유혹을 만드셨는지 또는 신앙인들이 그 유혹에 부닥치도록 하느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셨는지 자주 논의되어 왔다. 그에 대한 답을 본문에서 찾기는 어렵다.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는 하느님께 집중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를 언급한 것이다. 유다교 기도와 공통점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예수에게 독특하다. 예수 자신에 대해 직접 말하고 있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잘 드러난 기도다. 예수의 기도는 당시 기도들과 비교하면 아주 짧고 어려운 단어도 없다.하느님과 친밀함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께 말하는 기도다. 그러한 친밀함을 기도에서 망각하면 안된다. 하느님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분이시다.   


역사에서 가톨릭교회가 발간해온 교리서에는 십계명, 주의 기도, 사도신경 해설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아쉬움이 있다. 산상수훈은 교리서에 왜 빠졌을까. 초대교회 공의회에서 만든 사도신경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메시지를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다. 현대 성서신학의 연구 성과를 참조하여 역사의 예수를 존중하고 강조하는 새 사도신경이 미래의 공의회에 의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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