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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57 : 참된 행복
  • 김근수
  • 등록 2016-12-01 10:09:01
  • 수정 2016-12-01 10: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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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소리로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고 외치자 2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루카 11,27-28) 




제자들을 가르침에서(루카 11,1-13) 시작되어 바리사이파 비판에서(루카 11,37-54) 끝나는 긴 이야기중 핵심 문장이 소개되고 있다. 제자들과 바리사이, 군중들에게 루카는 여인의 모범을 들이밀고 있다. 여인처럼 하라는 말이다. 예수를 보았지만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을 루카는 겨냥하고 있다.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루카 8,40. 43-44) 당시 사용되던 평범한 표현으로 예수를 칭찬하였다. 그녀가 말한 상황은 앞 단락에서 이러했었다. “예수께서 벙어리 마귀 하나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벙어리는 곧 말을 하게 되었다. 군중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러는 "그는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으며, 또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루카 11,14) 군중은 예수의 마귀 쫓음이란 사건을, 여인은 예수의 말씀에 주목하였다. 여성은 사건보다 말씀에 더 이끌린다는 명제를 여기서 끌어낼 필요는 없겠다. 


예수를 빈정대는 사람들 앞에서 여인은 큰소리로 예수를 칭송한 것이다. 쉽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탄의 힘을 이긴 아들을 낳은 여인은 얼마나 행복한 분인가. 악마를 물리친 자녀도 행복하고 그런 자식을 낳고 기른 부모도 마땅히 행복하다. 훌륭한 자녀를 둔 부모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하느님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둔 어머니 마리아는 그 얼마나 행복한 여인인가. 


여인은 마리아를 칭송했지만 사실 예수를 함께 칭송한 것이다. 어느 여인이나 그런 아들을 갖고 싶다는 뜻도 포함되었다. 어머니 찬양은 고대 사회에서 널리 퍼진 문학 양식에 속한다(Bovon, 3/2 187). “너를 돕는 네 아비의 하느님께서 하신 일, 너에게 복을 내리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 하느님께서 위로 하늘에서 내리시는 복, 땅 속에 숨겨두신 지하수의 복, 젖가슴과 태에서 솟아나게 하시는 복”(창세기 49,25) 야곱이 유언에서 여인을 축복하는 말이었다. 이 여인은 유다교 회당 예배에서 창세기 이 말씀을 듣고 기억한 것일까.  


군중 속에서 여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여인은 감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회 아닌가. 어디서 겁없이 여인이 큰소리를 지른단 말인가. 여인의 용기는 놀랍다. 사회 통념을 깨버린 여인을 예수는 조금도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여인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한가지 더 가르쳐 주었다. 큰소리로 말했다는epairein ten ponen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오직 루카복음에만 있다(루카 17,13; 사도행전 2,14; 14,11; 22,22). 여인이여, 큰소리로 외쳐라. 가난한 사람들이여, 큰소리로 외쳐라. 평신도여, 큰소리로 외쳐라. 


여인의 믿음(28)과 외침(27)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믿음(28)과 외침(27) 사이에 대조를 강조하는가, 아니면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오늘 단락을 좌우하는 중요하지만 놓치기 쉬운 질문이다. 개신교 성서주석은 여인의 믿음과 외침의 대조를 중시해서 믿음을 더 주목하고, 가톨릭 성서주석은 차이를 강조해서 여인의 외침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묵상하기 더 좋아한다고 Bovon은 말한다(Bovon, 3/2 185). 그의 주장이 흥미롭지만 씁쓸하게 느껴진다. 교파마다 성서해설을 달리 할 이유와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예수가 섭섭하겠다.


여인의 칭송과 예수의 답변은 같은 방식의 대응이 루카에서 이미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하고 말씀하셨다”(루카 8,21) 듣고 행동함을 루카 8,21이 말했다면, 듣고 따름이 오늘 단락 루카 11,21에서 강조되고 있다. 듣고 따름은 공동성서에서(구약)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탈출기 15,26; 19,5; 신명기 5,1; 6,3). 


예수가 대화 상대를 반박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전하는 사람의 말에 공감하면서 동시에 생각의 폭을 넌지시 넓혀주는 친절한 대화 방식이다. 거친 말투로 직격탄을 쏘아대는 어법도 있지만 친절하고 너그러운 말투도 예수에게 있었다. 상대에 따라 말투를 달리 하는 예수다. 강자에게 강하게 약자에게 약하게 말하는 예수다. 이른바 교황식 어법이란 용어가 있다. 듣는 사람 누구도 불쾌함을 느끼지 않게 외교적으로 말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외교적인 교황식 어법을 버리고 예수처럼 정직하게 말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여인의 아픔을 예수는 잘 알고 있었다. 자녀가 없는 여인의 아픔을 위로하는 말도 했다. 불임으로 자녀를 가지 못한 여인의 고통은 얼마나 심한 당시 사회였던가. 자녀가 적은 부모의 고통도 적지 않았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과, 아기를 낳아보지 못하고 젖을 빨려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루카 23,29) 전쟁과 환난의 시기에 여인들이 겪는 고통을 예수는 알았다(루카 21,23; 23,28-29). 종교인들과 신학자들은 여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예수처럼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가. 


복음서에서 예수를 칭찬했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지식인, 부자, 종교인, 권력자들이 예수를 칭찬한 적은 전혀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칭찬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예수의 평판은 아주 좋았음을 가리킨다. 


예수의 답변은 어머니 마리아를 낮추어 보는 발언이 전혀 아니다. 세상에 어떤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무시한단 말인가. 나쁜 아들도 자기 어머니를 좋게 말하려 애쓰는 법이다. 더구나 지극정성 효자인 예수가 자기 어머니를 왜 낮추어 말한단 말인가. 어떤 식으로든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를 떼어놓으려 애쓰는 성서해설을 보면 내 마음이 아프다. 세계적으로 존중받는 성서학자인 Bovon조차 이런 주장을 했다. “가족에게 그렇게 적대감있게 그리고 자기 친어머니에게도 그렇게 거리를 두면서 처신했던 예수”(Bovon, 3/2, 187, 주 20; der sich gegenueber der Familie so feindlich und gegenueber seiner eigenen Mutter so distanziert verhaelt.) 나는 찬성할 수 없는 주장이다. 


성서학자 M.P. Scott는 하느님 백성 마리아가 메시아를 낳았기 때문에 복되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백성을 구한 것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조금 심하지 않았는가. 어머니로서보다 신앙인으로서 마리아가 더 복되다는 마이스타 에크하르트 말이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 성도들과 함께 진지하게 여길 말이다(Bovon, 3/2 189에서).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성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믿음을 강조한다 해서 마리아를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 마리아를 존중한다 하여 믿음을 약화시킬 이유도 없다. 개신교 성도들도 마리아의 가치를 충분히 느낄 그날이 어서 오기를 빈다. 마리아 없이도 훌륭한 믿음을 가지는 개신교 성도들을 가톨릭 신자들이 진심으로 이해할 그날이 어서 오기를 빈다. 


로메로 대주교는 이런 말을 했었다. “이렇게 착한 양떼와 함께 있다면, 착한 목자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을 존경하는 말이다. 그러자 엘살바도르 가난한 백성들이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착한 양떼와 함께 있다면, 착한 목자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를 칭송하는 말이다. 가난한 백성들과 로메로 대주교는 서로 존중하며 함께 회개하고 신앙적으로 성장하였다. 오늘 단락에서 이름 없는 여인과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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