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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58 : 기적을 요구하는 시대
  • 김근수
  • 등록 2016-12-06 11:41:40
  • 수정 2016-12-06 11: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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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군중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하고 탄식하시며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30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31 심판 날이 오면 남쪽 나라의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32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11,29-32)

 

 


앞 단락에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루카 11.16) 그 요구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다. 이방인인 사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을 긍정적 사례로 들면서 예수를 거절하는 동족 유다인을 비판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인 예수 자신이 사람들이 요구하는 바로 그 기적이다(29). 예수의 지혜는 솔로몬의 지혜를 넘어서지만 이 세대가 존중하지 않고 있다(31). 요나보다 더 큰 예수의 설교를 이 세대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32). 


‘이 세대’라는 성서의 표현은 하느님 백성의 전체적 현실과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다(루카 7,31; 9,41; 11,50; 사도행전 2,40). 군중은 예수에게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에게 기적을 주실 수 있다(이사야 8,18; 에제키엘 12,6; 24,24). 기적을 요구하던 역사는 길다. 기드온(판관기 6,36-40), 히즈키야도(열왕기하 20,8-11) 있다. 아하스처럼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으려고 기적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긴 했었다(이사야 7,12). 


아주 드물었던 이름 요나는 공동성서(구약성서) 요나서를 가리키지만,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29절 요나의 기적은 많은 해석을 낳고 있다. 요나 자신이 하느님이 주신 기적인가(Wolter 424), 아니면 요나가 준 기적을 가리키는가? 고기 배에서 구출됨을 가리키는가(요나서 1-2장), 아니면 니느웨에서 요나가 전하는 말을 가리키는가. 성서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요나는 구출된 신앙인을 상징하는 모델로 초대교회 예술작품에 즐겨 등장했다. 카타콤베 무덤의 벽에 그려진 요나 그림은 부활된 예수를 가리켰다. 


루카는 고기배에서 구출된 요나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연결하려 했을까.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서 1-2장의 구출 이야기를 모른다. 루카는 요나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심판관으로 내세우려 했던 것이 아닐까. 요나가 회개를 촉구하는(Schuermann, 2. 273) 설교를 한 것은 아니었고 멸망을 선포할 뿐이었다(요나 3,4;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가 하루 동안 돌아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남쪽 나라의 여왕은 솔로몬을 방문했던 사바의 여왕을 가리킨다(열왕기상 10,1-29; 역대기하 9,1-12). 32절은 요나의 심판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을 가리킨다(요나 3,1-9). 심판 날에 남쪽 나라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관 역할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증인 역할을 맡을 것이다. 이방인들이 같은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바오로는 말한다(로마 2,27). 구약성서 그리스 번역본에서 요나는 그 사명이 kerygma(선포)라고 표현된 유일한 예언자였다(요나 1,2; 3,4,5). 루카는 왜 남쪽 나라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을 인용했을까. 루카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다. 예수를 거부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과 예수의 복음은 이방인에게도 전파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오늘 단락은 원래 누구에게 전해졌을까. 제자들 말고 누가 이런 말을 후대에 전했을까. 예수 운동이 당시 유다 모든 그룹에서 거부당했다. 예수뿐 아니라 루카 공동체도 선교에서 쓰라린 실패 경험을 했다. 그 추억이 오늘 단락에 반영된 것 같다. 예수를 따르는 초대 공동체에게 사람들이 기적을 끈질기게 요구했던 사실은 초대교회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Bovon, 3, 195).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라고 바오로가 통탄했다(코린토전서 1,22).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하고 예수께 대들었던 사람들에게 요한복음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8-22)라는 엄청난 경고로 응수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한 세대를 단죄한 예수의 말은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큰 위로가 되었다. 


예수의 이 말을 듣는 유다인들은 아주 불쾌했을 것이다. 꼭 이방인을 예로 들어 예수는 동족을 비판해야 했다는 말인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 비유도 마찬가지였다. 유다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는 꼭 선행의 모범으로 들이밀어야 했다는 말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느님과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유다인의 자취를 예수는 솔직하게 고발하는 것이다. 자기 역사에서 부끄러운 경험이 없는 민족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자기 역사에서 부끄러운 경험이 없는 종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우리 개인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회개하지 않는 민족, 회개하지 않는 종교, 회개하지 않는 개인이 문제 아닌가. 


요나의 기적 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사람의 아들이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30). 예수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는 그리스도교의 장엄한 선언이다. 마태오에게 행동하는 예수가 기적이라면 루카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한 예수가 기적이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예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인류에게 예수를 선물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외에는 자랑할게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밖에는 그 어느 것도 자랑해서는 안된다. 돈도 명예도 유물도 결국 아무 쓸모없다. 


요나가 이방인에게 낯선 사람이라면, 예수는 여전히 세상에서 낯선 분이다. 예수를 모르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선교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 사명이다. 선교와 실패는 함께 걷는가. 실패 경험이 없는 선교가 제대로 된 선교일까. 예수를 제대로 알고 알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 세 사람만 제대로 예수에게 이끌어도 그 인생은 성공한 셈이다. 내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멀어져 갔을까. 성직자 탓에, 교회 탓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무관심하게 되었을까.


협박하는 예수. 그리스도인에게 확 다가오는 표현일까. 저주도 하고 욕설도 했던 예수의 모습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낯선 것 같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습관적인 잘못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외는 아니다. 설교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 예수와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예수 사이에 얼마나 거리가 있을까. 


진짜 예수를 우리는 알고 싶지 않거나 받아들이기 싫어하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편한 예수만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를 편집하여 선택하는 잘못에서 우리는 언제나 해방될 수 있을까. 성서공부는 하지 않은 채 부실한 교리교육과 그저 그렇고 그런 강론에서 들은 일부 지식을 마치 정답처럼 알고 평생을 그럭저럭 사는지 모른다. 성당을 평생 오가지만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누구 책임일까. 


유다인은 예수에게 기적을 요구하고 기다렸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 시대 사람들은 종교에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 시대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에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기적? 해방? 사람들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 교회가 신경 써보기라도 했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는가. 


시대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 시대를 사람들이 또한 만들었으니. 시대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시대를 만든다. 시대와 사람이 서로 악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깊은 어두움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 세대 한국이 왜 이렇게도 악할까!” 예수가 우리 시대 한국에 말하는지 모른다. “이 세대 가톨릭교회는 왜 이렇게도 악할까!” 예수가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약성서를 잘 모르는 탓에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 시대 역사를 잘 모르는 탓에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현대사를 잘 모르는 탓에 성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구약성서, 예수 시대 역사, 그리고 한국 현대사를 아는 그만큼 예수와 성서를 제대로 알고 깨닫고 따를 수 있지 않을까. 신자교육에 관심이 적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실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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