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청와대가 종교인, 법조인뿐 아니라 민간인까지 사찰하고 법조계, 종교계의 각종 사안에 개입을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8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과 전국언론노동조합(이하 언론노조),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시민사회단체는 비망록을 분석해, 민간인·법조인·종교인을 사찰한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 신부 뒷조사… “개인 약점 잡아 겁박하려는 시도”
비망록 가운데 2014년 8월 7일자 메모에는 ‘<장> 신부 뒷조사. 경찰, 국정원 Team 구성 => 6국 국장급’이라고 적혀있고, 9월 14일자 메모 ‘신부. 전교조 원칙대로 처리 - 뚜벅뚜벅, 조용히’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메모에 적힌 장(長)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로 추정된다.
이에 민변 등 시민사회단체는 청와대가 천주교 신부에 대한 뒷조사를 경찰과 국정원 팀에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청와대가 ‘뒷조사’라는 표현을 쓴 것은 충격적이며, 스스로도 위법적인 사찰이라는 점을 인식한 것은 직권 남용”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개인의 약점을 수집하여 겁박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비판하며, “청와대는 뒷조사를 한 천주교 신부가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염 추기경 발언, 같은 자세를 타 종교지도자도 취하도록 노력”
‘<장> 염 추기경 발언, 같은 자세를 타 종교지도자도 취하도록 노력’. 8월 27일 메모에 적힌 내용이다.
이 메모가 작성된 바로 전날, 염수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청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염 추기경은 세월호 해법을 묻는 기자들에게 “아픔을 해결할 때 누가 그 아픔을 이용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생각하는 대로 이뤄지면 좋겠지만 어느 선에서 양보해야 서로 뜻이 합쳐진다”고 발언해 마치 ‘세월호 참사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로 비춰지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같은 염 추기경의 발언이 정부로부터는 ‘타 종교지도자들이 취해야 할 모범사례’로 꼽힌 것이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궁을 피하기 위해 염 추기경의 ‘모범적인 발언’을 다른 종교에도 확산시키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황관련 각종 지원’은 또 무슨말?
앞서 7일, < 민중의 소리 >가 보도한 비망록 관련 내용에도 염수정 추기경 이름이 등장한다. 2014년 7월 23일자 메모에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선처탄원(8/11 宣告(선고)) - 염수정(추기경), 자승(조계종 총무원장), 김희중 대주교, 김영주 목사 (7/17) - 국가전복기도세력에 대한 선처탄원은 곤란. 교황 관련 각종 지원에 불구, 기록으로 남겨야’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염수정 추기경은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이석기 전 의원의 가족들 부탁을 받고 “저는 법의 전문가가 아니라 뭐라 단언하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귀 재판부가 법의 원칙에 따라 바르고 공정한 재판을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동시에 그들이 우리 사회의 한 일원으로 화해와 통합, 평화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청합니다”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정부가 ‘국가전복기도세력에 대한 선처탄원은 곤란. 교황 관련 각종 지원에 불구, 기록으로 남겨야’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정확한 지원 내역은 알 수 없으나, 천주교가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같은 정황은 염 추기경이 그동안 정부로부터 받은 각종 지원에 발이 묶여 지금 같은 혼란정국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냐는 의혹을 만든다.
염수정 추기경은 사제들의 정치 참여를 비판했다. 불의한 정권과 약자들의 고통엔 침묵했지만, 국회에서 가톨릭신자 국회의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종교계 원로 초청 간담회에 참석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면에서 염 추기경의 정치 참여는 매우 활발했다고 평가한다.
앞서 시민사회단체들이 분석한 대로 종교계에 행해진 각종 개입과 사찰내역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또한 천주교가 교황 방한과 관련해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히고 해명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