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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1 : 예수를 당당히 고백하라
  • 김근수
  • 등록 2017-03-07 1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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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서로 짓밟힐 지경이 되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시오. 그들의 위선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3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두운 곳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밝은 데서 들릴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입니다.

4 나의 친구들아, 잘 들으시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5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겠습니다. 그분은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입니다. 6 참새 다섯 마리가 단돈 두 푼에 팔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고 계십니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그 흔한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습니까?

8 "잘 들으시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습니다. 9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11 여러분은 회당이나 관리나 권력자들 앞에 끌려갈 때에 무슨 말로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마시오. 12 성령께서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을 바로 그 자리에서 일러주실 것입니다 (루카 12,1-12) 




예수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번갈아가며 가르치고 있다. 12,1-12는 제자들에게, 12,13-21은 군중에게, 12, 22-53은 제자들에게, 12,54-59는 군중에게 설교한다. 그리고 13,1-9에서 제자와 군중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재산에 대한 적절한 태도(루카 12,13-21; 12, 22-34), 시대의 징표를 알아챔이(루카 12,35-46; 12,54-13,9) 두 주제다. 돈과 시간, 인간이 평생 부닥칠 탐구 대상이다. 돈과 시간이 사실상 인간을, 개인을 규정한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위선이 먼저 다루어졌다(루카 12,1-3). 예수는 먼저 제자들에게(루카 6,17-20) 바리사이파의 누룩을(마르코 8,15)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을(마르코 8,15; 마태오 16,6.12) 조심하라는 것이다. 8-12절에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공개적 믿음을 격려하고 있다. 


바리사이에 대한 예수의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용기 있게 고백하라는 격려가 뒤따르고 있다. 루카 11,14-36 장면과 비슷하다. 예수는 루카 11,14부터 계속 군중에 둘러싸여 있다. 1절에서 ‘수없이 몰려들어’라고 번역된 muriades는(사도행전 21,20) ‘수천 명이 몰려들어’라고 좀 더 정확히 옮기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루카는 예수의 성공을 숫자로 과장하길 좋아한다(루카 4,14; 5,15; 9,14). 그렇게 많이 예수에게 몰려드는 군중에 비해 제자들의 숫자는 아주 적다. 


1절 proton은 ‘먼저, 특히’ 등으로 옮길 수 있다. 뒤에 나오는 ‘조심하시오’ 또는 앞에 나온 ‘제자들에게’를 가리킬 수도 있다. 1절 hypocrisis는 위선으로 흔히 번역되고 있다.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원래 연극에서 연극배우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위선보다는 연극으로 옮기는 게 더 낫겠다. 선하지 않은 데 선학 척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을 감추고 다른 사람인 체 연기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다. 바리사이를 hypocrisis로 비판하는 곳은(마태 23,13. 15. 23. 25. 27. 29) 안과 밖에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의도와 같다.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바리사이를 위선자라고 취급하지는 않았다. 루카는 누룩을 위선과 연결시킨 유일한 복음서 저자다. 위선은 오늘날 주로 도덕적 결함을 가리키지만, 17세기만 해도 유럽에서 가짜로 거짓 신앙인을 지적하는 종교적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성서에서 위선은 도덕이나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판단 능력의 부족을 가리켰다(Bovon, III/2, 249). 공정한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이 곧 위선자라는 말이다. 위선은 가정이나 종교 용어라기보다 우선 법률 용어다.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는 검찰이나 법관은 위선을 하는 것이다. 한국 검찰과 사법부는 이 단어를 심각하게 여겨야 하겠다. 


누룩은 성서에서 중요한 단어다. 예수가 말한 누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다. 발효 과정에서(루카 13,21) 누룩의 역할을 연상할 수 있다. 오래 발효된 누룩은 새로 발효될 누룩에 영향을 미치는, 순수하지 않은 부분으로 여겨졌다. 하느님에게만 바쳐지는 발효되지 않은 빵은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다급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기억하게 한다. 예수 제자들이 바리사이처럼 되는 것을 루카는 경고하는 것 같다. 예수 제자들이 제자답게 살지 않는 것이 곧 바리사이의 누룩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누룩 비유는(루카 13,20-21) 하느님나라의 긍정적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2절에서 감추어짐과 드러남, 어두운 곳과 밝은 곳, 속삭임과 지붕 위에서 선포됨 등 서로 반대되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4-7절은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이다. 인간의 죽음이 최고의 악인 것은 아니다(루카 9,25). 지옥에서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마태오 5,22. 39). 박해자들보다 하느님을 더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루카는 마태오에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그리스 철학에서 불멸의 영혼 개념과 모순되는 사태를 루카는 피하려 했다. 


2절 tameion은 창문이 없는 방을 가리킨다. 영지주의 그룹이나 그리스도교 수도사 사이에서 이 단어는 마음 내적 공간을 가리키는 신학적 의미를 가졌다. 평평한 지붕 위 공간은 사람들이 즐겨 모이고 대화하는 장소였다. 여기서 그리고 지붕 아래에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갈릴래아 농촌 작은 골방에서 조용히 다짐하던 믿음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모습에 루카는 자부심을 가졌다(사도행전 26,26). 


4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나의 친구들’이라 불렀다. 루카는 philos ‘친구’라는 단어를 루카복음에서 15번, 사도행전에서 3번, 모두 18번이나 사용했다. 마태오는 딱 한번 썼고(마태오 11,19), 마르코에는 없다. 루카는 친구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했다. 예수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른다. 우리는 무려 예수의 친구다!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마태오 10, 26) 부분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은(루카 12,4) 조금 다르다. 루카는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삼가고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느님이십니다”를 추가했다(야고보 4,7; 베드로전서 5,9). Geenna지옥은 루카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하느님이 누구를 죽이신다는 뜻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누구를 죽인다고 기록된 구절은 없다.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마태오 10,29) 부분이 6절에서 “참새 다섯 마리가 단돈 두 푼에 팔리는 경우”로 바뀌었다(루카 12,6). 십여 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이는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 저술 시기에 물가가 서로 많이 달랐다는 뜻일까. 머리카락(루카 21,18; 사도행전 27,34; 사무엘하 14,45) 보다 참새보다 인간의 생명은 훨씬 더 귀하다(루카 12,22-31). 참새 한 마리까지도 잊지 않는, 우리 머리카락도 다 세어두신 하느님은 사람 하나하나의 이름을 하늘에 기록하고 계시다(루카 10,20).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큰 결론으로 도달하는 논리 진행 방식을 루카는 택하고 있다.


8-9절에서 예수에 대한 개인의 태도가 심판에서 중요한 관건임이 분명해졌다. 루카는 예수를 사람의 아들과 동일시하고 있다(루카 5,24). 루카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예수를 주저 없이 고백하라.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한 사람은 박해가 두렵지 않다. 박해받는 상황을 오히려 복음 선포의 기회로 멋지게 역전시킬 수 있다.


10절 “사람의 아들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라는 부분과 9절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부분은 내용상 사실 충돌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를 거부한 베드로(루카 22,56-62), 유다교 지도자(사도행전 3,17; 17,30) 죄도 용서되는가. 서로 다른 배경에서 생긴 말을 루카가 한 자리에 모아 뒤섞어 편집한 탓에 생긴 곤혹스러움이다. 


성령의 약속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전해졌다(마르코 13,11; 마태오 10,9). 유다교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역사가 그 배경이다(루카 20,20). 박해받고 심문받는 자리는 복음을 선포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위로 말씀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 받지 못한다는 설교가 초대교회에서 유행했다(사도행전 13,46; 18,6; 26,11).


왜 꼭 바리사이인가. 누룩은 무엇이고 위선은 무엇일까. 4-7절에서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우리 시대 상식과 조금 다른 것 같다. 멀리 있는 하느님은 두렵지 않은 데, 가까이 있는 인간이 지옥 아닌가. 박근혜씨를 보며 나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차차 무신론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박근혜씨 같은 악마를 창조했다니, 믿기 어렵다. 위선을 피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예수에 대한 믿음을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느님나라 선포하는 것도 쉬울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을 고발하고 싸우기는 어려울 수 있다. 예수 이야기를 즐겨 전하지만, 악의 세력과 다투는 것을 애써 피하는 종교인이 아주 많다. 예수를 반쪽만 보는 사람들이다. 반대자와 싸우는 예수를 못 본 체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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