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에서 벌어진 ‘분서갱유’와 같은 사건은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다. 현대에 이르러 양상은 다르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저렴한 국가 중에 하나이다.
진의 시황제는 국가의 통일과 왕권을 확보하기 위해 도량형은 물론 모든 법의 기준을 마련하여 민중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민초들의 생각까지 도량형의 기준처럼 획일화 되기를 강력히 밀어부쳤다. 결국 사회의 기본 생활에 필요한 책을 제외한 역사서나 인문학 책은 모두 소각해 버렸다.
고대 서구 문명의 보고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로마의 어이없는 실수로 불타 없어졌지만 진시황은 강력한 권력과 통치권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절대 권력에 대항하는 문화를 말살한 것이므로 더욱 흉측하다.
고대로부터 권력자들이 기층민의 우민화를 얼마나 추구하였으며 권력에 대항하는 표현물에 대해 얼마나 사갈시 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같은 행태는 비일비재했으며 사마천의 ‘사기(태사공서)’를 들추지 않아도 당연지사였다.
특히 중세 가톨릭이 지배한 서구사회의 형편은 필설로 표현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심각했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비롯한 수많은 금서 목록은 지금에 보면 세계 명작 전집이 되고도 남을 지경이고 과학자들이 학문을 자율적으로 추구할 권리를 억압한 행위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신의 이름으로 돌려막은 대표적 케이스였다.
성서를 번역하거나 읽는 행위를 엄격히 제한하거나 금한 이유는 선점한 지식을 조금씩 나누거나 차단함으로써 민중을 지배하려는 목적이 일차적이었다. 훈민정음의 제정 반포를 앞장서서 반대한 최만리의 행태 역시 몽매해야 할 백성들과 지식의 공유로 인해, 권력자들의 국정 지배 능력이 약화될 것을 방지하려고 한 선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중세 이전에나 있었던 일이다.
문화는 인간의 이성적 사회적 성격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자기 발전을 위한 정당한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고유 원리에 따른 정당한 자율 행동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하며, 공동선의 한계 안에서 특수 집단이든 일반 사회든 공동체와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한, 어떤 불가침성을 누리는 것이다. (사목헌장 59. 다양한 문화 형태의 조화)
인류는 이러한 시대를 뚫고 차곡차곡 문화와 문명의 탑을 쌓아왔다. 고대 문자의 발명은 호모 사피엔스가 이루어 낸 선사 인문학의 알파였다. 선구자들은 문자 기록의 단순한 의미를 넘어 정의와 불의의 가름은 물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혈투까지 상세히 기록하여 역사의 마당 안에 펼쳐놓았다.
이런 일을 하기위해 부당한 권력과 맞서 싸운 문화의 희생자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문명이란 단어에는 가치중립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만 문화라는 단어에는 가치 개입적, 주관적 의미가 들어있어 그 저변이 매우 넓다. 인간의 문화만큼 거대한 담론은 없다.
문화에 대해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지배자들의 무지하기까지 한 사고 체계와 거기에 빌붙어 부역하며 기층민을 찍어 누르는 세력들의 반문화적, 반인륜적 행위가 일부나마 종식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걸리긴 했다.
공권력의 임무는 인간 문화 형태의 고유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모든 사람 가운데에, 소수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문화생활을 증진할 수 있는 조건과 수단을 강구하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문화가 제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권력이나 경제세력에 강제로 예속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사목헌장 59. 다양한 문화 형태의 조화)
지금 한국은 어떤 대통령의 복합적 악마적 종합선물세트 같은 일탈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은 정권에 저항하는 지식인, 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를 정부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작성하여 그들을 감시한 일이다. 국가가 일부 작가나 예술가들에게 당연히 재정적으로 지원해서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해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아닌 자신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블랙리스트를 불법적으로 만들어 그 일련의 계획에 따라 양심적 문화 종사자들에게 불이익을 준 상황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실 몇몇 권력의 부역자들이 대통령을 호가호위하며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당대에 일시적이고 제한적으로 발생하고 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다과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행위이다. 그러나 소위 블랙리스트로 지식인과 문화계 종사자들의 입을 막는다는 것은 당대 지식인에게 뿐만 아니라 미래를 살아야 하는 후손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폐해를 주는 일이기 때문에 죄질이 아주 나쁘다. 거기에 관련된 자들이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극구 부정하는 것을 보면 자신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일제의 식민지 문화 말살의 만행과 불령선인 리스트로 인한 친일파의 양산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유신시대와 5공을 통하여 언론 문화에 대한 탄압과 폭력으로 그 후유증을 경험했다. 그러한 입막음으로 당장은 쉽게 힘 안들이고 정권의 부정 비리를 덮어버리고 기득권을 유지할런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정권의 단말마적 행태인 국정교과서를 제작, 배포하려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블랙리스트를 운용하는 일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다양한 표현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정부의 문화 관료와 일반 문화 종사자들에게 극도의 수치심과 창피함을 주는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블랙리스트’라는 괴물은 후대의 문화적 환경까지 황폐화시키고 이 나라 지식인 예술인들에게 부당한 권력에 굴종과 예속을 강요하고 있다.
민주화를 이룬지 30년이 되었다는 이 시기에 뜬금없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애국의 상징으로 삼아, 국정농단과 부정부패 추방이 아닌 좌파 척결의 의지로 뒤흔드는 ‘애국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있다는 것도 참 이상한 일 중에 하나다. 또 민주화의 환희를 조금이라도 맛보았을 그들 앞에 획일적 밀리터리 센스로 뭉친 70년대 유신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현실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저개발 독재국가나 혹은 전쟁터에 있어야 할 계엄령을 주권자인 ‘애국시민’이 권력으로 하여금 선포하라고 하는 이런 황당한 일이 대명천지에 어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민주화에 대척점에 서 있는 군사문화를 옹호하며 주권 국가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부정은 물론 자신의 인권까지 내팽겨 치려는 행동을 ‘애국’이라고 하니 더욱 더 놀라울 뿐이다.
이는 결국 블랙리스트라는 허접한 문건으로 좌파를 양산, 앞으로도 있을 ‘태극기를 흔드는 애국자들’을 집합시키고 좌파라고 낙인찍은 이들에 대한 그들의 과한 행동을 합리화한 결과다. 그들로서는 블랙리스트로 자신들의 치부를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블랙리스트’ 자체가 곧 ‘천부적 인권’을 무시하는 압제자들이 애써 민중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실재적 탄압 의지’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한 꼴이 되어 버렸다.
교회는 “인간 예술과 학문의 문화가 자기 분야에서 고유한 원리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이 정당한 자유를 인정하며” 인간 문화, 특히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천명한다. 이 모든 것은 또한 인간이 도덕 질서와 공익을 지키는 한, 자유로이진리를 탐구하고 자기의견을 표현하고 전파하며 어떠한 예술이든 연마할 수 있고 또 공적사건들도 진실대로 더 잘 알게 되기를 요구한다. (사목헌장 59. 다양한 문화 형태의 조화)
남북의 분단을 빌미로 수구 기득권 정권을 연장시키려는 추악한 권력의 속성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려 한다. 보수를 참칭하며 자신의 사익을 우선으로 하는 이 나라 법비들의 문화 창작자들에 대한 몰상식한 탄압은 인문학적 소양의 상실이 가져온 불행이다. 수구의 안방에서 희희낙락거리며 ‘블랙리스트’를 펼쳐드는 그들만의 저열한 몰문화적 행위는 대한민국 헌법의 이름으로라도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
세상의 권력은 블랙리스트 작성이란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게다가 권력의 부역자들이 먼저 앞서서 최정점 권력자의 입맛을 돋운다. 권력의 기생충들은 좌우의 이념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추악한 비리와 부정을 애국심이라는 방어기제로 숨기려고 한다. 이 애국심이 블랙리스트 작성자에게는 최고의 반찬이다. 통속의 애국자들은 이러한 블랙리스트 문제는 희한하게도 전혀 자신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만났을 때 최고 권력자의 자세다. 보기 좋은 떡 같은 블랙리스트 작성의 유혹을 떨칠 수 있는 권력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이를 이성적으로라도 거부할 수 없다면 그는 이미 지도자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지도자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서 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을 잊고 있으니 아이러니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물론,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데 잘못에 대한 성찰도 있을 리가 없다.
의무감으로 뭉친 국민들의 협력이 국가의 일상생활에서 그 풍부한 효과를 거두려면, 국가 권력의 기능과 기관의 적절한 분립과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실효적 권리보호가 이루어지는 실정법 질서가 요구된다. 모든 국민에게 부과된 의무와 함께, 모든 개인과 가정과 단체의 권리와 그 권리행사가 인정되고 보호받고 증진되어야 한다. 통치자들은 가정, 사회, 문화 단체와 중간 집단이나 기구 등을 방해하거나 그 정당한 효과적 활동을 금지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기꺼이 질서 있게 이를 증진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사목헌장 75. 모든 사람의 공공 생활 협력)
도대체 우리나라 역사상 이러한 예가 있을까? 최근까지 역사에 그와 비견될만한 군주는 권력의 사유화를 위해 민초를 짓밟은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와 폭군 연산 이외에는 없을 것 같다. 임란 당시에 왕 선조도 백성의 안위에 대해서는 나름 걱정했다. 소심함과 질투로 평정심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상적인 심리를 유지하긴 했다.
감정 없이 입꼬리로만 치켜 올리는 웃음과 억지로 겸손하게 보이려는 가식으로 포장된 위선적 행태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국정농단의 엄연한 증거가 매일같이 쌓여가는 지금의 상황도 인지를 못하는 그에게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이 나라에 어떤 폐해를 주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화 말살과 인권 탄압의 구체적 표징인 블랙리스트를 운용한 것보다 형사적 뇌물죄가 더 중대한 범죄가 아니냐는 그 어리석은 판단은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거나, 아니 상식의 부족이라는 말로는 변명이 안 된다. 부패한 권력을 몰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포악한 정권을 비판하는 양심적 문화 종사자들에 대해 소위 ‘블랙리스트’를 펼쳐 차별적 대우를 가함으로써 부당한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는 정권도 척결 타도의 대상이다.
반세기 전에 선포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사목헌장에서 이미 천명하였듯이, 앞으로는 이러한 ‘다양한 문화형태의 조화’가 이 나라에서 ‘악마의 명부’인 ‘블랙리스트’로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이 땅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문화가 생성되기를 기도한다.
문화는 인간의 이성적 사회적 성격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자기 발전을 위한 정당한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고유 원리에 따른 정당한 자율 행동의 권리를 요구한다. (사목헌장 59. 다양한 문화형태의 조화)
항간에 박근혜는 최순실에게 속아서 일이 이렇게 됐다는 동정론이 횡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 일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속았다는 것은 그대로 인정한다하더라도 의도적으로 리스트를 만들어 감시하고 불이익을 준 행위는 무엇으로 변명 할 텐가! 최순실이 작성해서 손에라도 쥐어졌단 말인가? 정말 앙천대소할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기쁨과 희망)
제2부 몇 가지 긴급 과제, 제2장 문화 발전의 촉진, 제2절 올바른 문화 발전의 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