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한국현대사의 비극으로 남겨진 제주 4·3사건의 온전한 해결을 촉구했다.
<제주의 소리>에 따르면 강우일 주교는 9일 제주대학교에서 열린 ‘제주 삼일절 기념 시위 70주년 기념 콘퍼런스’ 기조강연에서 4·3사건에 대해 “용서받기 힘든 반인륜적 범죄”라고 밝히며, 이러한 범죄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이를 기억하고 속죄하는 반성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탄핵 정국에 일어난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한·미 양국의 사드 미사일 부품 반입, 그리고 이에 대한 중국 정부의 외교적·경제적 반발 등을 언급하며 “요즘 한반도 안팎으로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고도의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한반도 상황을 20세기 초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격돌하던 조선왕조 말기와 유사하다고 평가한다”며 “무력 충돌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의 기억을 되새겨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제주 4·3사건이 일본의 제국주의와 미국의 군사통치, 그리고 남북 분단의 이데올로기적 분열 등이 뒤섞여 발생한 반인륜적 범죄라고 설명했다. 또한,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학살했던 충격적인 사건이 은폐된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나도 2002년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제주 4·3사건에 대해 백지상태였다”고 고백하며 “4·3에 대한 자료와 도민들의 경험담을 듣고 나서야 제주 4·3사건의 진상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대다수의 국민은 제주 4·3사건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토양 사정으로 농작물 재배가 힘든 제주도에서 일제의 극심한 수탈로 쌀 가격이 280배가량 뛰어올라 전국 최악의 식량난에 봉착했지만, 미 군정은 아무런 경제정책을 펼치지 않고, 치안만 유지하는 점령군으로 군림해 도민들의 불만과 불신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또한, 일제에 부역하던 경찰이 그대로 치안을 맡아,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불만을 제기하는 도민을 사회주의자로 몰아 탄압했다고 설명했다. 최악의 식량난을 겪던 도민들은 생존을 위해 집회와 봉기 등을 벌였지만, 미 군정은 경찰의 보고만을 토대로 도민들을 사회주의자로 간주해 대대적인 척결을 지시했다.
강 주교는 “이런 사실은 한국에서 은폐됐고 오늘날까지 차단돼왔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민이 까막눈이 되도록 강요당해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라며 “동시대를 살아온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죄책감이 든다”고 심정을 밝혔다.
그는 “올바른 국가 통치는 사회 현실의 문제점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이미 일어난 실패와 불의를 바르게 분석하고 이를 속죄하는 조치가 이뤄져야 같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다. 제주 4·3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의 중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주교의 기조강연에 이어 ‘제주 민족자결주의 운동의 전통 및 인식과 책임: 미국, 유엔 그리고 제주사건’을 주제로 호프 엘리자벳 메이(Dr. Hope Elizabeth May) 미국 중앙 미시간학교 교수와 이영철 전남대학교 교수, 고창훈 세계섬학회장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