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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6 :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 김근수
  • 등록 2017-04-11 11:20:07
  • 수정 2017-04-11 11:3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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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압니까? 3 아닙니다. 잘 들으시오. 여러분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 4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압니까? 5 아닙니다. 잘 들으시오. 여러분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습니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7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그러자 8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루카 13,1-9) 



갑자기 전해진 슬픈 소식에 예수와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크게 바뀌었다. 살다 보면 그런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겪는가. 내 일기장에 남 이야기가 함께 쓰여지는 것이다. 시대의 요청에 자기 입장을 밝혀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일 신학자 칼 라너는 쓰고 싶었던 주제보다 자기 시대의 질문에 응답하는 글을 많이 썼다. 본문에서 예수도 마찬가지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던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J. Jeremias, Gleichnisse 146).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이tines 예수에게 끔찍한 시국 사건 하나를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무장 독립투사나 예수 제자인 것 같지는 않고 순례자들인 것 같다.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한 소식보다 사람의 피와 제물로 사용된 동물의 피가 섞였다는 점을 더 강조한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과 동물의 피가 뒤섞여 율법을 어겼다는 사실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소식보다 더 심각하고 충격이란 말인가? 그들은 두 가지에 흥분한 것 같다. 제물의 피와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가 섞인 것, 그 피가 다른 곳이 아니고 거룩한 성전의 제단이라는 것 말이다. 


빌라도는 유다인을 죽였을 뿐 아니라 유다교를 심하게 모욕했다. 빌라도의 악행은 루카복음에 두 번 전해졌다.(루카 3,1; 23장) 빌라도에 대한 유다인의 미움을 성서 독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빌라도의 악행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불행하게도 드물다. 빌라도보다 유다를 더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서를 잘 모르는 탓이다. 1절 갈릴래아 사람들은 당시 어법으로 보면 로마군대에 무력 저항했던 젤로데 독립투사들을 가리킨다(사도행전 5,37).


사람이야기를 일러드렸다apaggello는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이야기를 전할 때 쓰이던 동사다. 예수에게 누가 소식을 알리는 경우는 복음서에 드물다. 초대교회는 예수는 모든 것을 알고 미래까지 내다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루카 5,22; 9,30-31). 요즘 신자들은 주교나 신부에게 시국 사건을 제대로 전달하는가. 주교나 신부들은 시국 사건을 정확히 알고는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처럼 시국 사건을 예로 들어 복음을 해설하는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설교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꼭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세례자 요한보다 예언자 요한이라는 용어를 더 좋아한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복음서와 그리스도교에서 세례자 요한이라는 호칭을 즐겨 쓰기는 한다. 그러나 요한은 정치비평가요 예언자 역할에 충실했다. 요한을 예언자 요한이라고 불러야 요한의 제자 예수를 우리가 예언자 예수라고 더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예언자 요한의 연속성을 그리스도교는 더 강조해야 한다. 예수도 예언자 요한처럼 예언자요 정치비판가였으며 예언자로서 예언자 요한처럼 처형당했다. 예수는 분명 예언자였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와 전례에서 예언자 예수라는 호칭은 거의 사리지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20세기 해방신학은 예수에게 해방자라는 적절한 호칭을 선물했다. 예언자 예수라는 호칭도 어서 복권시키자고 나는 말하고 싶다.


2절에서 예수의 반문에 어떤 배경이 있을까? 유다교 신학은 죄hamartolos와 벌 사이에 원인과 결과 관계가 있다고 해설했다. 죽임을 당한 사람은 죽어 마땅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죽을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망가졌거나 도덕적 범죄가 그것이다. 그 논리에 따르면, 로마 군대에게 학살당해 마땅할 어떤 큰 잘못이 젤로데 독립군에게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예수는 즉답을 피한 채 4절에서 다른 시국 사건을 예로 들었고, 6절 이하에서 포도원지기와 주인의 비유를 들어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실로암 탑은 에제키아왕 때 지어진 운하가 연결되어 있다(열왕기하 20,20; 이사야 8,6; 요한 9,7). 신약성서 시대에는 헤로데왕 때 만들어진 성벽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루카 13,4에 보이는 탑은 그 일부로 여겨진다. 70년에 끝난 유다 독립전쟁 때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사망자가 나온 사실은 있지만 4절에 언급된 18명 죽음을 알려준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1절과 4절에 인용된 두 사건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냐 여부는 루카의 관심사가 아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왜 희생을 당하느냐를 다루는 이른바 변신론Theodizee도 루카의 최종 관심은 아니다. 


예수의 결론은 이렇다. 1. 죽음을 당한 사람은 자기 죄가 있어서 마땅히 죽은 것이 아니다. 2. 죽음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가 없어서 죽음을 모면한 것이 아니다. 3. 누구나 가능한 한 회개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시국 사건, 자연 재해의 희생자를 두고 원인과 결과라는 도식에 갇혀 있으면 안 되겠다. 우리 죄가 더해지고 합쳐져서 어디선가 죄 없는 희생자가 생기고 또 늘어나고 있다. 


▲ (사진출처=4·16연대)


6절 이하 예수의 비유는 예수 탄생 500여 년 전 Ahiqar 역사에서 아주 비슷하게 전해지고 있다(Bovon, III/2, 373). 시리아어와 아르메니아어로 전승되고 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과 관계, 무화과나무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 백성에 대한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있다. 포도원지기를 농민이나 축산 농가, 공무원, 성직자 또는 부하를 지극히 아끼는 군인, 경찰로 바꾸어, 그 입장과 심정을 헤아려도 좋겠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같이 심는 것이 유행이었다. 올리브 나무나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땅의 영양을 두고 다투고 빼앗는 경쟁 관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를 지탱하는 역할도 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서 곧 베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신명기 20,6). 


그런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라고 말한 주인이 무슨 특별한 잘못을 지시한 것은 아니다. 8-9절에서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나무를 지극히 아낀 것이다. 습기를 제공하기 위해 둘레를 파는 포도원지기에게서 제주도 감귤 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수고를 느낄 것 같다. 작은 내 귤밭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하게 되었다. 포도원지기의 말에서 백성을 아끼는 예수 심정을 느낄 것 같다. 포도원지기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주인은 자비롭고 참을성 많은 하느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6절 이하 예수 비유가 나는 조금 이상하다. 포도밭과 무화과나무 비유라면 중심은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포도 아닌가.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땅의 영양을 다투고 빼앗는 경쟁관계 아닌가. 그런데 왜 포도원지기는 그렇게 무화과나무에 정성과 애정을 쏟았을까? 혹시 이 비유를 종교 대화에 아름답게 적용할 수는 없을까. 주인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모두에 관심이 있다. 포도원지기도 마찬가지다. 


포도나무를 그리스도교라 여기고 무화과나무를 유다교로 여기면 어떨까. 무화과나무를 이웃 종교로 여기면 어떨까. 이웃 종교가 잘 자라도록 그리스도교가 애정을 가지는 것이다. 이웃 종교가 잘 되도록 그리스도교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면 어떨까. 무화과나무가 잘 자라면 포도나무도 잘 자라게 된다. 종교간 아름다운 선의의 경쟁이 기대된다.  



본문에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 예수가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고향 나자렛에서 겨우 십리 떨어진 세포리스에서 자신이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로마군대에 의한 유다인 대량 학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부모 형제나 동네 사람들에게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제주 어린이들이 4·3사건을 들으면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것과 비슷하겠다. 성직자들은 목회자들은 예수처럼 역사를 시국 사건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는 백성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국 사건을 예로 들어 설교하고 있다. 로메로 대주교도 그렇게 설교했다.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된 일요일 미사 강론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지난주에 발생한 시국사건을 국민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영화 ‘로메로’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성체를 높이 들어 올리는 장면에서 총에 맞았다. 


그러나 사실은 설교 도중에 총에 맞아 쓰러졌다. 로메로 대주교는 목숨 걸고 설교했고 설교하다가 목숨을 바쳤다. 그런 설교는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사람을 감동시킨다. 설교는 로메로 대주교처럼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주교 신부 중에 그런 사람 얼마나 있을까. 



오늘 미사와 예배에서 가장 문제되는 부분이 설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설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신자들이 강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강론을 듣는 것이 어렵고, 목자는 강론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는 것이 유감입니다”(복음의 기쁨, 135) 


안병무 선생은 80년대부터 한신대에서 번역 출간한 국제성서주석 시리즈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히 제목 설교의 풍조 아래서 성서를 앞세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서를 가장 등한시하는 경향이 지배하는 한국 강단의 잘못’이다.  


“연구와 기도와 묵상에 오랜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54) 사제가 더 거룩하냐 덜 거룩하냐 하는 문제는 말씀을 선포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현대의 사제 양성, 26). “강론자는 말씀의 관상자이고 또한 그의 백성의 관상자입니다…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인간 상황에, 하느님 말씀의 빛을 갈구하는 경험에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54) “사람들의 말에 많이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삶을 나누고, 그들에게 사랑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58) 


“강론자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사람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 같은 거친 단어를 교황 문헌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교황이 그런 단어를 사제를 겨냥하여 쓰고 있는 사례는, 내가 아는 한 처음이다. 그처럼 강론이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주교와 사제들은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 소리를 교황이나 신자들에게 듣지 않도록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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