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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7 : 안식일은 인간 해방을 위해
  • 김근수
  • 등록 2017-04-18 1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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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11 마침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12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 “여인아, 당신 병이 이미 당신에게서 떨어졌습니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모였던 사람들에게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병을 고쳐 달라 하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였다.


15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 위선자들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습니까? 16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주지 말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셨다. 17 이 말씀에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으나 군중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온갖 훌륭한 일을 보고 모두 기뻐하였다. (루카 13,10-17) 



루카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치유 기적과 해설로 이루어졌다. 기적이 기쁨뿐 아니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루카복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소개된 단락이 많다(루카 5,17-26; 6,6-11, 14,1-6).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여러 번 가르쳤는데(루카 4,44; 6,6) 루카에서 그 모습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예수 심정이 착잡하겠다. 하느님을 알고 선조들의 신앙 이야기를 들었으며 신앙의 동지들과 정을 나누던 회당 아닌가. 얼마 전 다녀온 이란에서 이슬람교 모스크 몇 군데를 방문했었다. 모스크는 무슬림에게 기도와 예배뿐 아니라 묵상, 독서 심지어 누워서 낮잠을 즐기기도 하는 친숙한 생활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 성당은 내게 추억어린 곳이었다. 모스크처럼 성당과 교회처럼 회당은 예수의 신앙과 성장에 중요한 곳이다. 종교는 진리보다 추억이나 감성으로 먼저 다가서기도 한다. 


기적이 기쁨뿐 아니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느님나라 메시지가 기쁨뿐 아니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느님나라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악의 세력들에게 하느님나라 메시지는 불쾌하고 자기들 이익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루카 11,17부터 예수는 줄곧 말씀하셨다lego. 이제 예수는 가르치신다didasko. 본문에서 예수의 행동 순서를 자세히 관찰해보자. 예수는 여인을 보고, 부르고, 말하고, 손을 얹어주었다. 보는 것이 첫 번째 행동이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 보기, 판단하기, 행동하기라는 3단계 순서가 있다. 보는 것이 첫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펴낸 권고 「복음의 기쁨」과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도 보는 것이 첫째다. 「복음의 기쁨」 1장은 교회의 위기를, 2장은 세상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예수는 18년 동안 허리가 굽은 여인을 보고 알아보았다. 부드러운 눈길은 불교에서도 보시에 속한다. 예수는 부드러운 눈길로 여인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매혹되는 이유 중 하나도 교황의 부드러운 눈길 아닐까. 부드러운 눈길로 사람과 세상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 사랑 아닌가. 예수는 여인을 불렀다. 예수 음성도 부드럽지 않았을까? 예수의 눈길과 음성에 여인은 벌써 병이 나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고통 받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이 이미 사랑 아닌가. 예수가 손을 얹자 비로소 여인의 병이 나은 것이 아니다. 예수는 병이 나은 사실을 먼저 알려주고 그 다음에 손을 얹었다. 여인의 초조한 심정을 예수는 벌써 알아차렸다. 환자의 초조한 마음을 의사는 이미 알고 있다. 고백성사에 온 신자의 초조한 심정을 고백사제는 이미 알고 있다. 걱정 말아요, 그대. 



“여인아gunai”하고 예수가 부른다. Lego는 단어를, prospono는 음성을 듣는다는 뜻의 1인칭 단수 동사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단어logos만 듣지 말고 음성도 듣는 것이 좋다. 여인아gunai라는 호칭은 당시 흔히 쓰였다(루카 22,57; 골로사이 3,18). 여인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호칭이 전혀 아니다. 예수는 가나안 여인에게(마태오 15,27-28), 사마리아 여인에게(루카 4,21), 마리아 막달라에게(요한 20,13.15) 그 호칭을 썼다.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인아’(요한 2,4)라고 부른 구절을 마치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를 무시한 것처럼 엉뚱하게 해석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다.  


후대에 회당에서 여자와 남자의 자리를 당연하게 분리하게 된 것이 예수 시대에도 적용되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Kremer, 145). 병 걸린 여인이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석한 것은 당시에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여인이 사실 큰 맘 먹고 용기를 내어 예수에게 온 것이다. 병에 걸린 여인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예수는 여인을 불러 치유하고 있다. 손을 환자의 몸에 얹는 동작을 취했다(루카 4,40). 하느님의 치유 행위를 예수가 중재자로서 전달하는 모습이다. 18년 동안 앓았던 병이 즉시parakrema 나았다. 여인은 손을 얹어 치유해준 예수를 찬양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여인이 무슨 말로 찬양을 했는지 나와 있지는 않다. 치유된 환자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루카는 기록하기 좋아했다(루카 5,25; 사도행전 3,8).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의 치유 모습을 본 회당장이 분개한다. 회당장은 회당 건물과 예배 질서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각 회당에 한 사람씩 있었다(Bovon, III/2, 401). 놀랍게도 회당장은 예수에게 직접 화를 내지 않고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안식일 규정(탈출기 20,9, 신명기 5,13)을 설명하고 있다. 조금 어색한 장면이다. 군중들은 예수에게 치유받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루카 6,18). 



15절에서 예수는 위선자들hypocritai이라는 복수명사를 썼다. 군중을 비난한 것은 아니다. 본문에 등장한 회당장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모두를 겨냥한 것이다. 17절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hoi antikeimenoi을 가리킨다. 예수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안식일에 자기 소나 나귀에게 하던 일을 예수는 여인에게 한 것뿐이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그것도 금지했다. 예수는 율법을 아주 엄격하게 적용했던 에세네파보다 여러 경우에 예외를 허용하던 바리사이파와 가까웠던 것 같다(Bovon, III/2, 402). 소나 나귀에게 안식일에 물을 먹이는 일에 대해 유다교의 율법해설집 미쉬나에 규정은 없다. 예수는 요한 7,21-23에서처럼 풀어주는, 해방시켜주는 일에 관심 있었다. 


16절에서 여인이 짐승보다 귀중하다는 논리로 두 가지가 소개되었다. 여인은 인간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루카 1,54-55; 3,7-9; 16,22-31)이다. 루카 19,9에서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아들이라 부른 것과 같은 경우다. 여인의 치유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성취된 사건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인은 사탄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그래서 17절에서 군중은 예수의 설명을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 루카는 여인의 치유뿐 아니라 예수의 행동을 보고 기뻐하는 군중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내리는 호의를 주셨다(탈출기 34,10). 진리가 드러날 때(루카 10,20), 악령을 추방할 때(루카 10,17.20), 구원을 약속할 때(루카 2,10; 15,5; 19,6) 루카는 기쁨의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여인도 히브리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 못지않게 병에서 해방이라는 기쁨을 누렸다. 치유는 몸 신학에서 체험하는 해방 사건이라고 나는 표현하고 싶다. 


사실 예수는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안식일 율법을 모독한 사실도 없고 폐지하자고 주장한 적도 없었다. 예수는 율법을 아주 엄격하게 적용했던 에세네파보다 여러 경우에 예외를 허용하던 바리사이파와 가까웠던 것 같다(Bovon, III/2, 402). 안식일 규정을 하느님의 구원행위라는 핵심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여인은 병에서 해방된 새로운 인간이 되어 안식일을 빛냈다. 예수는 치유라는 해방사건을 중재하여 안식일을 빛냈다. 예수는 그런 방식으로 안식일을 존중한 것이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는 회당장에게서 “여성사제는 안됩니다”라고 우기는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여성 사제직을 거부하는 신학자들에게 위선자들이여라고 호통 치는 예수를 보는 것 같다. “2,000년이나 매여 있었는데, 지금 풀어주지 말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고 대답하는 예수를 보는 것 같다.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한 여인에게서 여성사제를 수락하고 감사하는 여인들을 보는 것 같다. 내가 부당하고 지나친 상상을 하는 것인가.


▲ 성공회의 여성 사제들 (사진출처=anglicanunion)


안식일은 인간 해방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 해방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안식일은 무의미하다. 주일미사나 주일 성수가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일 성수나 주일 미사, 주일이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적절히 활용되고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억울함이 주일 예배나 미사와 기도에서 잘 반영되고 있는가? 주일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인간과 피조물이 함께 쉬는 휴식의 날이긴 하지만, 하느님의 진정한 해방 사건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주일은 휴식의 날이지만 먼저 해방의 날이다.


예수는 악마의 힘을 물리쳤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1. 악마(사탄)의 힘은 약해졌다. 2. 악마의 힘은 약해졌으니, 우리가 악마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악마와 싸워야 한다. 3. 악마를 숭배해선 안 된다. 악마를 병, 우상, 악의 세력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겠다. 악마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해선 안 되며 악마와 싸워야 한다. 우상을 두려워하거나 숭배해선 안 되며 우상과 싸워야 한다. 악의 세력을 두려워하거나 숭배해선 안 되며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악의 세력을 불의한 권력과 재벌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불의한 권력과 재벌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는 데 찬성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재벌이 없으면 국가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재벌의 잔이 넘쳐야 가난한 사람들도 그 넘치는 물의 일부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낙수효과는 부자가 돈을 많이 벌면 가난한 이들도 누리게 된다는 원리다. 그러나 낙수효과는 부자들의 거짓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말처럼 낙수효과는 증명되지 않았다. 낙수효과는 부자들의 말장난이요 부자독식을 숨기는 사기다. 재벌은 잔을 더 키워서 재산을 더 독점하고 말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고 「복음의 기쁨」과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경제를 버리고, 돈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불의한 권력과 재벌 같은 대표적인 악의 세력을 두려워하거나 숭배해선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불의한 권력과 재벌 같은 악의 세력을 남몰래 숭배하거나 협조하기도 한다. 악의 세력을 숭배하거나 두려워하진 않지만 악의 세력과 싸울 생각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상은 학문과 자연과학이 지금보다 덜 발달했던 옛 시대나 후진국 이야기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우상은 우리 시대와 선진국에서도 날뛰고 있다. 돈과 권력이 매력적인 우상으로 드러내놓고 숭배되고 있다. 돈이 전부라는 생각이 심지어 종교에도 깊숙이 파고들었다. 돈을 하느님처럼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와 성직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아니라 돈, 미국,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는 우스갯소리도 생겼지 않은가. 교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아니라 예수천국 교회지옥이라는 단어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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