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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8 :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 김근수
  • 등록 2017-05-03 12:15:50
  • 수정 2017-05-10 11: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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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으며 또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19 어떤 사람이 겨자씨 한 알을 밭에 뿌렸습니다. 겨자씨는 싹이 돋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겨자씨와 같습니다”


2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21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 덩이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누룩과 같습니다”(루카 13,18-21)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수백 년 동안 성서학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어왔다(Bovon, III/2, 409). 예수가 진짜 말한 비유라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는 비밀 코드처럼 여겨졌다. 하느님 나라 비유는 예수 가르침에서 독특한 부분이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처음과 끝 사이의 성장을 강조하는가 대조를 강조하는가. 개신교 성서학자들은 대조에(J. Jeremias 등), 가톨릭 성서학자들은 성장을(O.Kuss 등) 좀 더 강조하는 것 같다(Bovon, III/2, 409). 마르코는 대조를, 루카는 성장을 더 강조하고 있다. 


앞 단락에서 18년 동안 아팠던 여인을 치료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 관점에서 자신의 활동을 해설하고 있다. 병 치유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표지이다. 루카 13,1-9처럼 앞부분을 보충하며 뒤이을 여행기를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핵심 메시지다(루카 4,43; 11,2). 


18절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처럼 하느님 나라를 예수가 1인칭 단수 입장에서 해설하는 경우는 루카복음에만 있다. 하느님 나라라는 신비를 풀 유일한 주인공은 예수라는 말을 루카는 하고 싶었던 것이다. 루카에는 예수가 비유로 시작하는 단락이 다섯 번 나온다.   


겨자씨to sinapi 비유는 남자들과 농부의 세계에서 가져왔다. 겨자 씨앗 하나를 가리킨다(요한 12,24; 고린토전서 15,37). 팔레스티나 지방에는 검은 겨자가 많았다. 유다교 랍비들은 가장 작은 것을 가리킬 때 겨자씨를 즐겨 인용했다. 겨자씨는 이슬람 경전 쿠란에도 나온다(수르 21,48; 31,15). 


랍비들은 들판에서 자라는 겨자씨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다. 루카는 왜 겨자씨를 밭에 정원에 뿌렸다고 했을까? 고대에도 사람들은 들판과 텃밭을 구분했다. 들판에서 마구 자라는 야생 겨자가 아니라 집 근처 밭에서 정성들여 가꾼 겨자씨를 루카는 말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이 정성 들여 가꾸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르코 4, 30-32처럼 작은 씨앗과 엄청난 푸성귀 사이의 대조를 강조한 것은 아니다. 루카는 겨자씨 한 알에서 싹이 돋고 자라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가지에 깃드는 성장 과정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새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다교에서 해설되곤 했다. 마르코에는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말은 없었다. 마르코에서 새들은 가지 그늘에 깃드는데, 루카는 나무 가지에 깃든다(에제키엘 17,23; 31,6; 다니엘 4,18)고 표현하였다. 


사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자그만 겨자씨(루카 17,6)가 성장해서 1.2~2.5미터 정도까지 자라는 나무가 된다. 겨자는 일년생 식물로서 빨리 성장한다. 겨자나무에 새가 깃들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문헌은 공동성서 몇 구절 외엔 사실 없다. 나무의 키와 새가 깃드느냐 여부는 관계없다. 


거대한 삼나무가 아니라 아주 작은 겨자씨가 하느님 나라 비유에 등장했다. 일상의 자그만 희망들이 하느님 나라의 소중한 씨앗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백성들의 노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주고 있지만 그 희망을 사람들이 가꾸도록 격려하고 요구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누룩 비유는 여인과 가정의 세계에서 빌려왔다(코린토전서 5,6; 갈라디아 5,9). 예수는 여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여인의 세계를 배려하고 있다. 오늘 어느 남성 신학자가 여성의 세계를 잘 알며 거기에서 이야기 소재를 즐겨 가져오는가. 나는 부끄럽다. 


여기서도 대조보다 성장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겨자씨 비유가 작은 것과 큰 것 사이 비유라면 누룩 비유는 적은 것과 많은 것 사이 비유다. 적은 양의 누룩이 엄청난 양의 밀가루를 부풀게 하듯, 하느님 나라의 적은 모범들이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의 향기로 가득 채울 것이다. 누룩과 효모는 조금 다르다. 이스라엘에서 빵을 구울 때 효모가 아니라 누룩을 사용했다(Bovon, III/2, 418).  


누룩의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발효 과정은 때때로 본질을 변질시키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유목민 유다인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래서 유다인 축제에는 누룩을 넣은 빵은 제물로 쓰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오늘도 유다인들은 축제에 오래된 누룩을 버리고 누룩 없는 빵을 먹는다. 


예수는 알면 알수록 참 재미있는 분이다. 겨자씨 비유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놀라움을 주었다면 누룩 비유는 유다인에게 언짢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누룩이 유다교 축제에도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다른 랍비들처럼 모세 율법을 자주 인용하여 가르침을 해설하지는 않았다. 모세 율법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리한 논리 전개방식이었는데 말이다. 교황 문헌을 즐겨 인용하거나 성서 구절을 마구 인용하는 습관에도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아무 데나 함부로 인용할 일이 아니다. 


남들이 별로 인용하지 않는 소재를 과감하게 제시하는 것 또한 예수의 특징이었다. 도덕적으로 모범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복음서 여기저기서 신앙의 모범으로 불쑥 내놓는 예수에게 종교적으로 경건하다고 자처한 사람들은 적지 않게 불쾌했을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 지배층과 종교 지배층의 허울을 벗기고 비난한 예수였다. 


모든 끝은 처음을 가지고 있다. 처음이 없으면 끝이 있을 수 없다. 처음과 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처음과 끝은 서로 대조적일 수 있다. 처음과 끝 사이에 성장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적 진리를 예수는 비유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본문이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1. 하느님 나라는 이미 성장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일터와 가정에서, 여인의 세계와 남자의 세계에서, 모든 일상 영역에서 아주 작은 곳에서도 두루 목격할 수 있다. 2.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이 멈추게 방해할 수 없다. 


▲ 적폐청산을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의 힘으로 박근혜 씨를 탄핵, 구속시키고 촛불대선을 이끌어냈다. ⓒ 곽찬


하느님 나라는 이미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주 들어왔고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또 맹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과 용기 있게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더 자주 망각하고 외면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만 하고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세력과 싸우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천하고 가르쳤다. 예수를 보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보아야 하고, 하느님 나라를 보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보는 것이다. 예수를 보면 하느님 나라를 동시에 떠올려야 하고, 하느님 나라를 보면 예수를 동시에 떠올려야 한다. 예수와 하느님 나라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둘 중 하나만 놓쳐도 사실 다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외면한 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 얼굴만 주로 보고 있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하고 있는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가 왜 하느님 나라 비유를 여기저기서 자주 반복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과 행동을 자주 보았지만,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평생 교회나 성당을 다녀도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예수 이야기는 자주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성직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하느님 나라 망각의 역사라고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마틴 켈러가 한탄한 바 있다. 나는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망각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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