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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9 : 구원 받기 위해 지금 행동하라
  • 김근수
  • 등록 2017-05-09 0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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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동네와 마을에 들러서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24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시오.  


25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버린 뒤에는 여러분이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할 것입니다. 26 그래서 여러분이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해도 27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28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데 여러분만 밖에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입니다.  


29 그러나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입니다. 30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루카 13,22-30) 





4복음서는 갈릴래아 시절과 예루살렘 가는 길의 예수 역사를 말씀과 행동 주제로 모아 크게 엮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그와 다르게 시간 별로 아주 상세히 다루고 있다. 마르코복음은 완성의 뜻을 지닌 숫자 7을 이용하여 예수 삶을 7주로 보고 기록한 책으로 주장한 학자도 있다. 갈릴래아 시절부터 예루살렘 도착까지 기간을 6주로,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1주를 지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예수의 3일 또는 예수의 사흘이라는 단어는 예수 죽음에서 부활까지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는 금방 이해한다. 예수의 3일을 예수 삶의 세 단계로 이해해도 좋겠다. 갈릴래아 시절 예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 가는 길의 예수, 예루살렘에서 예수 말이다. 세 단계에서 예수의 핵심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되지만, 활동 방식과 주제는 크게 바뀌었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씀과 기적과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했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말씀과 행동으로 희생과 죽음에 기초한 제자교육을 시켰다. 예루살렘에서 적대자들과 논쟁하며 저항과 십자가를 선포하고 처형되었다. 그렇게 살았던 예수를 하느님은 의로운 삶으로 선포하시며 부활시키셨다. 나는 이 구분을 기초로 성서해설을 계속 쓰고 있다.  


본문은 예수 활동 3단계 중 두 번째인 예루살렘 가는 길의 예수를 그리고 있다. 이른바 루카의 예수 여행기중 2부이자 마지막 부분(루카 13,22-17,10)이 시작되는 곳이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예수는 본격적인 적대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정치, 경제, 종교 지배층이 예수의 주요 적대자들이다. 그들은 수도 예루살렘에 살고 있다. 예수의 주요 적대자들이 예수를 찾아 죽이려는 게 아니다. 예수가 적대자들을 직접 찾아가 대결하는 구도다. 아직까지는 예수에게 관심 가진 사람들과 주로 오가는 이야기가 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간다. 달마가 동쪽으로 가듯,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군대가 수도 아바나로 향하듯 말이다. 고향 갈릴래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정이 아니다. 예수 최후의 길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사실을 지금 대목에서 독자들은 잊기 쉬웠다. 멀리 앞쪽인 루카 9,51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한 사실이 소개되었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여러 도시와 마을을 예수는 방문하고 있다. 루카는 그리스도교를 기본적으로 도시에서 생긴 운동으로 보고 있다(루카 4,31; 5,12; 7,1). 



본문에서 루카는 예수의 방랑자 삶과 가르침 두 주제를 언급하면서 또한 연결하고 있다. 예수는 뭐니 뭐니 해도 방랑자요 노숙자다. 직업을 스스로 포기하고 가족을 떠나 순례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예수는 가르치기 위해 방랑했다. 붓다가 걸인 종교의 창시자라면 예수는 방랑 종교의 창시자다. 가르치려고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정착 생활을 한 공자와 붓다와는 조금 다르다. 


루카는 예루살렘 가는 길의 예수에서 치유 활동을 말하지 않고 있다. 갈릴래아에서 치유 기록은 많았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치유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예수는 주로 제자들과 어울리며 가르침에 집중했다. 바리사이나 군중들과 접촉은 갈릴래아 시절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본문에 중요한 구절이 세 개나 있다.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지금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만 해도 엄청난 말이다. 행동하는 예수의 면모가 보이는 단락이다. 예수 자신이 먼저 행동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행동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23절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라는 질문은 당시 시대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마태 22,14; 25,1-13; 요한 7,49) 지식인들이 특히 그 문제를 열중하여 생각했었다(Bovon, III/2, 431). 이사야 예언자는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이사야 37,32). “나는 구원받을 사람에 속하는가?” 라는 질문을 누구나 알게 모르게 고뇌하던 사회였다.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질문했는데, 예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는 주제라는 뜻이다. 


24절에서 루카는 도시 입구에 있던 육중한 문을 생각한 것 같다(Bovon, III/2, 433). 밤이 시작되면 그 문은 닫힌다. 아직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옆에 있던 작은 문을 통해 들어올 수 있다. 예수 시대는 해가 넘어가고 종말을 기다리는 밤중이라는 전제가 루카에게 있었다. 예수의 답변은 천국에 대한 사실과 정보를 알려준 것이 아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적을 것이라고 확인한 게 아니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각자 어서 애쓰라는 당부다. 


‘힘을 다하시오’ 라는 말은 그리스 운동 경기에서 따온 것 같다(티모테오전서 6,12; 티모테오후서 4,7; 히브리서 12,1). 플라톤도 그렇게 말한 적 있다. 싸움, 노력ho agon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agonia와 관계있다. 죽을 각오로 자기 구원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뜻인가. 25절에서 주인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아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있는 힘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25절에서 잔치에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사무엘하 11,13; 열왕기상 1,25; 열왕기하 25,29), 주인에게 배웠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없다. ‘먹고 마셨고’를 미사와 예배에 참여하여 성체와 성혈을 함께 나누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주인에게 배웠다’를 성서교육과 교리교육, 신심교육 등을 통해 예수 가르침을 알고 익혔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릅니다” (마태오 10,33; 26,72; 티모테오후서 2,19) 라는 차가운 답변만 돌아오고 있다.  


26절 우리 동네는 예수의 동시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니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마카베오상 3,6; 시편 6,9; 마태오 7,22), 모두 물러가라”라는 법정의 판결문을 닮은 엄청난 말이 들려온다. “쫓겨나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마태오 8,11-; 13,42; 24,51)이라는 당시 유행했던 최종 심판의 말까지 들려온다. 


늦게 도착한 사실이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인가? 늦게 도착한 것이 대체 무슨 뜻일까. 악, 불의adikia는 중요한 개념이다. 바오로는 하느님에게 적대하는 인간을 가리키는 데 그 단어를 썼다(로마 3,5). 악,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잔치에서 함께 할 수 없다(루카 16,8-9; 18,6; 사도행전 8,23).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서 분리된 것은 구원뿐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제외된 것을 뜻한다.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지나치다. 통곡하며(이사야 15,3; 예레미야 3,21; 미가 7,4) 구원받지 못함을 한탄한다. 


29-30절에서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예감을 주고 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이사야 2,2; 61,5; 예레미야 1,15) 마태오는 유다인이 추방된 동쪽과 이집트 권력자 파라오 아래에서 노예살이하던 서쪽만 언급했지만 루카는 사방을 말하고 있다. 해외에 사는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생각한 것 같다.  


루카는 구원을 좁은 문이 있는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로 표현했다. 잔치는 하느님이 모든 인간에게 초대한다. 잔치는 미래에 개최된다. 그러나 잔치에 입장할 자격은 현재에 결정된다. 구원은 현재 우리 각자의 노력에 관계된다는 것이다.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본문의 결론은 그리스도교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상식을 무너뜨리는 전환의 말씀이다. 


구원받아 마땅할 것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고를 하는 것 같다. 구원 여부는 예수를 알고 있느냐 여부와 관계없다는 결론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만 받으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던 사람들은 큰일이겠다. 입을 벌려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발음만 하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던 사람들은 큰일이겠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기만 하면 저절로 천국 가는 줄 알고 있던 사람들은 큰일이겠다.


개신교 성도들이 여기서 조금 의아할 수 있겠다. 구원은 하느님이 공짜로 거저 주시는 선물 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없었다면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구원에 이르진 못한다. 구원은 하느님이 아무 조건 없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물 받기를 거절한다면, 하느님이 강제로 선물을 주시는가? 예수 모시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개신교는 주장하지 않는가. 예수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악행을 저지른 그리스도교 신자도 저절로 구원을 받는가? 예수도 바오로도 구원을 향한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거나 필요 없다고 한 적은 전혀 없다. 


불교는 자력 구원, 그리스도교는 타력 구원이라고 간단히 이해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자기 행동에 따른 점수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점을 보면 그리스도교 또한 자력 구원을 거절하는 게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할까. 하느님과 인간이 구원에 있어 동등하게 권리를 행사한다는 뜻은 아니다.  


▲ 지난 3일, 경북 성주군 소성리를 찾는 많은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경찰은 진밭교까지 행진한 시민들이 더이상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 곽찬


예수는 발코니에서 멍하고 세상을 바라본 사람이 아니다. 종편 TV나 조중동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채점하고 뒷북을 치던 사람이 아니다. 예수는 골방을 박차고 거리와 광장으로 나와 야전병원 같은 현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악의 세력에 저항한 분이었다. 


예수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였다.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현실 속에 깊숙이 들어가 현실 안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간 분이다. 현실을 관찰하고 관조하고 기도만 하는 것은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본받아 지금 행동하라. 구원 받기 위해 지금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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