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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70 : 권력자를 비판하는 예언자 예수
  • 김근수
  • 등록 2017-05-16 11:22:09
  • 수정 2017-05-16 13: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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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자 32 예수께서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 하고 전하시오. 3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합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셨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35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루카 13,31-35)





예수 죽음을 예고하고(31-33) 예루살렘 지배층을 비판하는(34-35) 두 주제로 이어진 단락이다. 예수 죽음은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지배층 비판은 가상의 독자들에게 향하고 있다. 성서학자들은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1. 예수의 여행기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목인가? 2. 예수의 답변은 예수 삶을 스스로 해석하고 있는가? 4복음서에서 예수가 자기 역사를 되돌아보고 해석하는 대목 있다면 바로 오늘 본문을 꼽아도 좋을 것이다.


31-33절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다. 바로 그 때는 루카에만 보이는 표현이다(루카 2,37).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루카 5,17), 왜 예수에게 그런 고급 정보를 알려주었는지 알기 어렵다. 헤로데가 예수의 스승 세례자 요한을 죽인 사실을 바라사이들은 알고 있었을까? 그들이 예수를 살리려고 애쓴 것일까. 헤로데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밀사로 예수에게 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리사이는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 시절과 예루살렘 가는 여정에서 예수와 접촉이 있었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 루카 19,9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에게 비판당했고(루카 11,39-44), 위선자라는 모욕까지 받았다(루카 12,1).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은 4복음서 저자들에게 공통이다. 루카는 바리사이파가 예수를 살려내려고 애썼다기보다 예수를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로 소개하고 있다(Wolter, 495).


헤로데는 헤로데 안티파스를 가리킨다(루카 3,1; 9,9). 루카복음에서 헤로데는 자주 언급되고 있다(루카 1,5; 9,7-9; 23,11). 31절에서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 영토 안에서, 즉 갈릴래아 지역에서 죽이려고 했다. 헤로데 역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예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 속한다고 루카는 보는 것이다. 


예수는 헤로데를 두려워하지 않고 빈정댄다. 사람들은 두려운 상대를 표범에, 허약한 상대를 여우에 비유했었다. 여우는 좋은 뜻으로는sensu bono 영리한, 나쁜 뜻으로는sensu malo 교활한 동물로 여겼다. 오늘과 내일은 사흘째(코린토전서 15,4; 루카 24,7) 되는 날에 완성될 하느님의 일을 준비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 삶을 세 단계로 나눈 가설을 떠올린다. 예수 삶은 여행기로 볼 수 있다(Bovon, III/2, 445). 갈릴래아, 예루살렘 가는 길, 예루살렘 3부작 말이다.  



마귀 추방과 병 치유는 역사의 예수를 잘 드러내는 대표적 활동이다. 마귀가 사라지고 병을 이기는 사건은 하느님 나라가 현실 안에서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다는 표징이다. 죽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자기 길을 계속 가겠다고 다짐한다(루카 4,40; 6,18; 8,2). 언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죽기 전에 자기 일을 충실히 하느냐가 예수에게 더 중요하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예수는 자신을 예언자로 의식했고 예언자 계열에 속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예수는 예언자로서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할 것이다. 예수가 고통을 찬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의 세력에 저항하고 싸울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인간적 계획으로도 정치적 힘으로도 예수의 사명을 저지할 수 없다. 바리사이 조언도, 헤로데의 흉계도, 빌라도의 권력도 예수를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루카는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다.


34절에서 예수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 예루살렘을 비판하고 있다. 예루살렘 비판은 문학 유형으로 보면 심판 문학에 속한다. 심판 문학은 예수 시대에 지혜문학과 함께 유행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유다인 전체나 예루살렘 시민들 전부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예수는 예루살렘 지배층을 비판하고 있다. 34절의 예루살렘, 너, 35절의 너희는 모두 예루살렘 지배층을 가리킨다. 1세기말 랍비 요하난 벤 쟈카이 (Jochanan ben Zakkai)는 갈릴래아 멸망을 이렇게 경고했었다. “갈릴래아야, 갈릴래아야, 너는 토라를 무시해왔구나. 너는 곧 억압자들에게 짓밟히리라”



예언자들은 악한 왕과 가짜 예언자들의 동맹을 목숨 걸고 비판했었다. 루카 시대에 마나쎄(열왕기하 21장)는 박해자의 대명사로, 이사야는 순교한 예언자의 대명사였다. 34절 돌로 치는구나는 율법이 정한 처형 방식을 가리킨다. 우상숭배(신명기 17,2-7), 주술(레위 20,27), 불효자(신명기 21,18-21), 안식일 위반(민수기 15,32-36) 해당자에게 돌로 쳐 죽이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 


암탉을 하느님을 나타내는 비유로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예수는 지배층에게 억압받고 휘둘리는 불쌍한 백성을 병아리에 비유했다(룻 2,12; 시편 36,8; 이사야 31,5). 예수는 백성을 불쌍하게 보고 있다. 억압자 지배층과 피억압자 민중을 구분하여 보고 있다. 피억압자 민중을 편드는 예언자들의 태도를 예수는 자녀들을 모으는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다. 모든 어머니는 이미 예언자다.


몇 번이나posakis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라는 구절은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가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한 적이 있었던가? 갈릴래아 지역을 포함한 그동안 활동에서 사람들을 얻는 데 실패한 예수의 자기 고백이요 한탄일까? 예수는 실패를 예감했던가. 35절에서 예수는 성전이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에제키엘 10,18; 11,23). 


루카복음 독자들은 공통년 70년에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렸을 것이다. 너희 성전이란 호칭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의 거리감을 드러내고 있다. 35절에서 예수는 더 이상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이 아니라 심판자로 행동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예루살렘 최후의 시간에서 예수는 심판자요 예언자로 처신한다. 35절 찬미 받으소서!는 묘하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태 문제에 대해 발표한 회칙 제목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인류 공동의 집이다. 지구는 우리에게 자매다.


▲ 예루살렘


본문에서 독자들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1.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2.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자의 죽음으로 이해했다. 3.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4.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루살렘 지배층과 연결시키고 있다. 로마 군대는 예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 비판에서 이미 로마 군대의 책임을 암시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다교 지배층은 하루에 두 번 로마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듯이, 사흘 후에 죽어도 오늘과 내일 예수는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준다. 계속된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로메로 대주교는 해외로 피신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백성들이 학살당할 때 함께 피 흘리는 교회는 존경받습니다’라고 순교하기 한 달 전 1980년 2월 17일 로메로 대주교는 강론했다.

 

예언자의 죽음은 곧 정치범으로서 죽음이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정치경제 분야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왕들을 사정없이 비판했다. 예언자들은 정치 평론가요 사회 비판가요 종교 비판가였다. 예언자 예수는 스승이던 예언자 요한(세례자 요한)처럼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 예수를 제대로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처럼 예언자의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로메로 대주교가 그중 하나였다.


▲ 로메로 대주교와 신자들


예수의 분노는 예루살렘 지배층과 예루살렘 성전 두 곳을 향하고 있다. 예수는 왜 예루살렘 지배층에 분노했을까. 예수는 왜 예루살렘 성전에 분노했을까. 예루살렘에서 지낸 예수 생애 마지막 시간에 그 까닭이 드디어 밝혀진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억압자 지배층에 대한 의로운 분노와 피억압자 민중에 대한 자비는 함께 해야 한다. 억압자 지배층에 대한 의로운 분노가 전혀 없이 피억압자 민중을 딱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 허무하다. 억압자 지배층은 그런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피억압자 민중에 대한 자비 없이 억압자 지배층에 대한 의로운 분노만으로는 민중에게 실제로 도움 될 길을 찾기 어렵다. 피억압자 민중에 대한 자비는 강조하지만 억압자 지배층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외면하는 종교인들이 아주 많다. 억압자 지배층은 그런 교활한 종교인들을 아주 좋아한다.


예수는 자신을 예언자로 생각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더 이상 예언자로 부르지 않고 있다. 가톨릭 전례와 기도문에서 예언자 예수라는 표현은 찾기 어렵다. 4복음서에서 예수에게 바친 많은 호칭 중에서 예언자 호칭은 교회 역사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오늘 가톨릭 전례와 기도문에서 예언자 예수라는 표현은 찾기 어렵다. 설교와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예언자라고 말하는 설교자는 아주 드물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고 말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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