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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71 :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
  • 김근수
  • 등록 2017-05-23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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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2 그 때 마침 예수 앞에는 수종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3 예수께서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법에 어긋납니까? 어긋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병자의 손을 붙잡으시고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5 그들에게 다시 물으셨다. “여러분은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하여 당장 구해 내지 않고 내버려두겠습니까?” 6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루카 14,1-6) 




바로 앞 단락에서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예수는 살해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담담하게 평소처럼 행동하는 예수다. 예수는 정치권력자의 살해 협박을 받으며 살았다. 살해 협박을 받으며 살고 있는 주교, 신부들이 한국에 지금 있는가? 살해 협박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아는 주교, 신부들이 있는가? 


루카 14,1-24는 4개의 식사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앞에서 나온 회개 촉구 이야기를 보충하고, 곧 이어질 예수와 죄인들 만남을 준비하는 역할이다. 바리사이 집에서 식사 이야기는 루카에서 이번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다. 루카 7,36-50, 11.37-52에 두 번 있었다. 앞의 두 이야기와 다르게 이번에는 안식일에 있었던 식사 이야기다. 루카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예수의 안식일 갈등(루카 6,1-5; 6-11; 13,10-17) 이야기다. 안식일에도 참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 예수다. 주일에도 갈등할 것은 갈등하고, 다툴 것은 다투어야 한다. 


식사 이야기는 고대와 신약성서 시대에 유행했던 문학 양식에 속한다. 그리스 문화에서 식사는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특히 교류하는 계기였다. 여행 중인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루카복음에서도 식사 이야기가 자주 등장했다. 레위라는 세리가 초대한 식사(루카 5,29-39),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 자리에서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카 7, 36-50), 마르타와 마리아(루카 10,38-42), 책망 받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루카 11,37-54),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사(루카 15,1-2), 자캐오의 초대(루카 19,5-6), 과월절 준비(루카 22, 7-13), 최후의 만찬(22,14-38). 예수는 밥상머리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했다. 


앞에 나왔던 안식일 치유 사건(루카 6,6-11; 13,10-17)처럼 예수의 말씀에 주제가 있다. 안식일 예배가 끝난 후 식사에 초대되는 장면이 소개된다.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라는 표현이 이상하다. 바리사이는 위계적으로 구성된 조직이 아니다(Bovon, III/2, 470). Wolter는 바리사이파에 위계질서가 비공식으로라도 있지 않겠느냐고 추측한다(Wolter, 501). 예루살렘 의회에 소속된 바리사이는 아닌 것 같다. 


왜 갑자기 수종병자 한 사람이 예수 앞에 있게 되었는지 설명되고 있지 않다. 수종병은 환자가 계속 목이 말라 물을 찾는, 당시 널리 퍼진 질병이었다. 수종병은 그리스 문학에서 욕망에 비유되곤 하였다. 간음한 여인은 수종병에 걸린다고 민수기는 기록하였다(민수기 5,21-22). 수종병에 걸린 사람은 종교적으로도 차별받았을 것이다(Bovon, III/2, 473). 수종병을 언급한 루카복음 저자를 의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의학 상식이 있는 사람 모두가 의사는 아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법에 어긋납니까? 어긋나지 않습니까?”라는 이분법 식으로 유다인은 묻지 않았다. 병의 종류와 생명의 위급함 정도를 묻곤 했다(Wolter, 502). 목이 아픈 사람은 안식일에도 약을 주었다.



예수는 치유 이전에 질문부터 하고 있다. 예수는 두 번째 질문에서 첫째 질문보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었다. 그들은 또 답변하지 못했다. 예수가 옳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 사정은 보기보다 좀 더 복잡하다. 유다인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법에 어긋납니까? 어긋나지 않습니까?”라는 이분법 식으로 묻지는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에게 답변하지 못하고 침묵한 것이다. 질문이 이상하면 답변할 필요가 없다. 유다인은 병의 종류와 생명의 위급함 정도를 묻곤 했다(Wolter, 502). 목이 아픈 사람은 안식일에도 약을 주었다.  


수종병자는 예수에게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 예수가 먼저 나서서 환자의 손을 잡고 고쳐주었을 뿐이다. 환자가 예수를 칭송했다는 말도 없다. 구덩이에 빠졌던 양 한 마리(마태 12,11), 소나 나귀(루카 13,15) 이야기는 이미 나왔다. 5절에서 예수는 우물에 빠진 아들이나 소를 언급했다. 소는 비싼 재산에 속한다. 세상 어느 나라 어느 농부가 우물에 빠진 자기 아들이나 소를 건지려 하지 않겠는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을 예수는 한 것이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당연히 자기 아들이나 소를 건질 것이다. 아들이나 소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가는 여정에서 예수의 주요 적대자로 본문에서 등장했다. 


쓸데없는 질문을 예수는 왜 했을까.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 지도자의 체면을 우선 생각했더라면, 예수는 함께 자리한 사람들에게 난감한 질문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안식일에 생명에 위급하지 않은 병이라도 고쳐주는 일이 중요하고 합당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안식일 본래 취지에 어울린다는 말이다. 


수종병은 목숨에 위급한 병은 아니다. 꿈란 공동체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동물을 건지지 못하게 했다. 식사는 식사고 논쟁은 논쟁이다. 예수는 말 할 때와 행동할 때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았다. 오직 옳으면 그뿐이다. 그전에, 그밖에, 그 후에 아무 것도 눈치 보고 그럴 필요가 없다. 청와대에 초대받은 주교들이 초대한 대통령에게 난감한 질문을 하고 올바른 말을 하던가? 주교들은 예수에게서 대체 무엇을 배웠나.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식사 자리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예수가 살면서 사람들과 가장 자주 한 행동은 식사라고 나는 감히 단언하고 싶다. 루카복음 해설서 제목을 나는 가난한 예수라고 붙였다. 그만큼 루카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예수처럼 중요하게 여겼다. 루카복음에는 식사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을 만큼 자주 등장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이 하나 있다. 여러 직업과 신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지만, 종교 지배층과 로마 군대가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수는 종교 지배층과 정치 지배층과는 식사한 적이 전혀 없다. 우연히 그랬을까. 예수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했다. 


▲ 2015년 11월 10일, 제5차 이탈리아 전국 가톨릭교회 총회 참석 차 이탈리아 피렌체에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가난한 프란치스코의 식탁’이라는 행려자 식당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라는 평범한 일상 행위를 중요한 종교행위로 승화시킨 종교 창시자는 예수가 유일하다. 그토록 식사는 종교적으로도 아주 중요하다. 성체성사는 전례 이전에 먼저 식사였다. 식사는 종교 행위 이전에 해방 사건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그만큼만 인간은 구원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살면서 얼마나 자주 식사했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부자들과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가. 그것이 당신을 우리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 

 

안식일은 구약성서에도 유다인의 생각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이라고 규정되진 않았었다. 창세기 2,2는 하느님이 일곱째 날에 창조 작업을 완성하셨다고 증언한다. 안식일은 그렇다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걸맞게 행동하는 날이다.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고 어떤 일은 해서는 안 되는가? 이것이 유다인들의 고뇌였다. 이 고민을 예수도 함께 한 것이다. 예수는 안식일의 참뜻을 동족 유다인에게 기억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야말로 진정으로 율법을 지켰다. 예수는 율법의 참 의미에 걸맞게 행동한 것이다. 예수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켰다. 그 사실을 루카는 독자들에게 외치고 싶은 것이다. 


개신교에서 가나안 성도라는 단어가 생겼다. 안나가를 거꾸로 읽으면 가나안이다.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성도를 가리키는 단어다. 성당에서는 냉담 신자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쉬는 신자라는 새 표현이 최근 등장했다. 오늘 루카 본문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한 가지 묻자. 누가 진짜 가나안 성도인가. 누가 진짜 쉬는 신자인가. 주일 미사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신자는 가나안 성도요 쉬는 신자인가. 


▲ ⓒ 최진


가나안 성도나 쉬는 신자가 교회와 성당에 발길을 끊은 이유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자기 탓도 있을 수 있고, 그리스도교의 부패에 질렸을 수도 있고, 목사와 신부나 동료 신자들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다시 돌아오고 싶은 생각도 있을 수 있다. 예수에 대한 그리움을 여전히 지니고 마음속에 교회나 성당을 품고 살 수도 있다. 가나안 성도나 쉬는 신자를 교회가 문제시하거나 나쁘게 보면 안 된다. 그들이 더 예수를 찾고 따르는지도 모른다. 신앙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상 율법 의미를 훼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겉으로는 열심한 신자 같지만 사실상 무신론자나 우상숭배자에 다름없는 신자들도 있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지만 사실상 무신론자에 불과한 신자들도 있다. 매일 미사를 집전하지만 쉬는 신자와 다름없는 신부나 주교들도 있다. 위선자 신자보다 착한 무신론자가 더 낫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얼마 전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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