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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72 : 낮은 자리에 앉아라
  • 김근수
  • 등록 2017-05-30 11:05:04
  • 수정 2017-05-30 11: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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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고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8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시오. 혹시 당신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당신과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당신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로 내려 앉아야 할 것입니다. 10 당신은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시오. 그러면 당신을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입니다. 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12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마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당신은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부르시오. 14  그러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입니다”


 15 같이 앉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16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17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습니다. 18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19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20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21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고 명령하였습니다. 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24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루카 14,7-24) 




루카복음에서 욕심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장면은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여러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protokathedria를 즐겨 찾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루카 11.43)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시오. 그들은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즐기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찾고 잔치에 가면 윗자리protoklisia에 앉으려 합니다”(루카 20,46) 하느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예수에게 청탁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추태를 독자들은 기억하리라(마르코 10,35-40). 오늘 본문은 얼핏 보아도 단순한 처세술이나 윤리적 모범을 가르치는 단락은 아닌 것 같다. 교회론, 사회교리와도 연결되고 있다.


7-10절은 루카에만 있다. 7절은 루카가 쓴 것 같다. 8-10절은 루카 작품, 초대교회가 쓴 것, 예수가 진짜 한 말씀으로 성서학자들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이른바 식탁 예절에 대한 비판을 통해 사회 질서에 대한 예수의 생각이 드러나는 단락이다. 당시 통용되었던 예전 중 하나인 잔치에서 자리 순서를 전제하고 있다. 식사 자리는 손님의 신분을 나타내는 곳이었다. 윗자리는 초대한 사람의 옆이나 귀빈 옆자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kalo에게 한마디 한다. 예수는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을 비판하고 있다(루카 22,24-29). 초대를 받거든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말이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는 말이다.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높은 사람 자리에 끼여들지 마라. 높은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 올라오십시오’ 하는 말 듣는 편이 낫다”(잠언 25,6-7)를 예수는 기억한 것 같다. 예수 시대에 종교적으로 경건하다는 사람들의 못된 처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사 중에도 있었고(코린토전서 11,20-34) 교회 역사에도 흔했다. 세상 질서를 예수는 뒤엎는다(루카 18,14; 마태오 18,4; 23,12). 


12-14절에서 예수는 초대한 사람에게 조언하고 있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고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그리스역 사무엘하 5,8) 초대하라는 말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라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은 당시 죄인들로 여겨졌던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당시에도 경제가 아니라 신학 범주에서 다루어졌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 이전에 죄인이었다. “돈 없는 게 죄여”라는 말이 우리 가슴을 후빈다. 



이스라엘에서 식사는 보통 이렇게 진행되었다. 종은 손님들이 오른손을 씻을 물을 가져온다. 초대한 사람이 식당 옆 공간에서 손님들에게 와인 한잔을 권한다. 이때 손님들은 덕담 한마디씩 나눈다. 아직 정식으로 식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아마 이때 앞 단락에 나온 수종병자가 예수를 만난 것 같다. 손님들이 다 도착하면 함께 식당으로 들어간다. 식탁 옆에서 준비된 깔개 위에 놓인 방석에 왼손을 얹고 오른손을 자유롭게 한 채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댄다. 주인은 큰소리로 모든 참석자의 이름으로 빵에 축복 기도를 한다. 식사가 끝날 무렵 주인은 술잔에 축복 기도를 한다. 종은 식사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모두 세 번 손님들 손 씻을 물을 가져온다. 


점심ariston, prandium은 오전 늦게 또는 낮에 먹는 식사를 가리킨다(요한 21,12.15). 저녁deipnon, coena은 오후 늦게 또는 저녁에 먹는 정찬을 가리킨다. 유다인은 주중에 아침 저녁 두 끼를 먹었고, 안식일에는 예배 후 점심 한 끼를 더 먹었다. 예수 시대에 나이 순서가 아니라 사회적 존경심에 따라 식사 자리가 정해진 것 같다(Bovon, III/2, 488). 유다인은 평소 식사 때엔 앉아서 먹지만, 휴일이나 축제나 손님을 초대했을 때 그리스 로마 관습처럼 비스듬히 기대거나 엎드려 먹었다. 본문에서는 아직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12절 이웃 사람들 앞에 형용사 ‘잘사는’을 루카는 추가했다. 빈부 격차가 심했던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겠다. 루카는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순서로 여기서 다시 언급했다(루카 7,22). 예수에게 병에서 해방을 간절히 바라던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었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식사에 초대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낮춘 사람으로 인정된다. 14절에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라는 표현이 보인다. 유다교는 오늘의 이란 지방에 있었던 조로아스터교에서 부활 사상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의인만 부활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지만 후에 모든 인간의 부활을 확장되었다(사도행전 10,42; 17,31; 24,15).


15-24절은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경고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잔치에 참석할 것인가, 즉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라는 주제겠다(이사야 25,6; 루카 13,29; 요한묵시록 19,9). 16절 어떤 사람은(루카 10,30; 15,11) 부자임에 틀림없다. 큰 잔치는 혼인 잔치로 종말의 기쁨을 나타내는 단어다. 17절에서 주인은 당시 관례에 따라 며칠 전 이미 초대장을 전달한 사람들에게 종을 시켜 다시 초대 사실을 전한다. 



18절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는 말은 물론 과장된 표현이다. 초대를 사절한 세 사람이 차례로 소개된다. 이 부분은 마태오에는 없다. 밭, 소, 아내가 잔치에 오지 않는 이유로 소개되었다. 밭, 소, 아내가 있는 셋은 경제적으로 모두 살 만한 사람들이다. 부자들은 하느님나라 초대를 거절하기 쉽다. 돈 없으면 장가가기 힘든 것은 지금 한국이나 당시 이스라엘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악 결혼한 신랑은 군복무가 면제되었다(신명기 24,5). 세 사람의 해명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분히 납득할 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마태오 22,6-7) 부분은 루카에 없다. 루카는 마태오의 그 구절이 잔인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마태오 22,9-10) 부분은 루카 14,21절에서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로 바뀌었다. 21절에서 집주인이 대단히 분노한 사실은 독자들에게 조금 어색할 수 있겠다. 초대를 무조건 수락할 필요는 없다. 초대할 자유도 있지만 초대를 거절할 자유도 있지 않은가. 루카에 따르면, 그들의 잘못은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분노한 집주인이 새로 불러 모으는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첫째 사람은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 둘째 사람은 예수가 특히 신경 썼던 죄인과 병자들, 셋째 사람은 이방인을 뜻하는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순서로 초대받았는지 눈여겨보자. 주인은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맨 처음 불렀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선택하신다. 한길과 골목, 길거리 등 시내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울타리 곁에 서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하느님은 잊지 않고 맨 처음 부르실 것이다. 


23절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정말 안타깝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어로 compelle intrare라고 잘못 번역했다. 마치 폭력이나 강제력을 행사해서라도 선교해도 좋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는 번역이다. 교회 역사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게 만든 구절이다. 말로 진지하게 권유하고 설득하라는 뜻이다(마르코 6,45; 루카 16,16). 어떤 종류의 폭력을 통한 복음 선포는 모두 죄다. 인간에 대한 구원 사업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국가적 방법을 동원해도 된다는 생각이 콘스탄티누스 이래 가톨릭 내부에 지배적이었다. 그 잘못된 생각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최종적으로 포기하였다(A 프란츤, 세계 교회사 446). 


유다교나 그리스도교 역사에 병자나 장애인 등을 예배와 종교의식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은 시절이 있었다. 신체 장애인을 사제 서품에서 제외시킨 역사도 있었다. 본문을 읽으면서 그런 역사가 떠올랐다. 예수는 본문에서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잔치에 먼저 부르셨다. 가톨릭교회는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 지난 2월 1일, 종교가 장애인 집단수용에 앞장서는 상황을 규탄하며 장애인 관련 단체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집회를 열었지만, 성당 측은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막았다. ⓒ 최진


예전을 중시한다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저 사람들은 언제나 철이 들까. 윗자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종교인 중에 수두룩하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대체 무엇을 배웠을까. 가난한 사람들은 윗자리에 앉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 옆에 먼저 앉으려고 서로 다투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24절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말씀에 누가 가장 소스라치게 놀랄까? 그리스도교 신자? 성직자? 자칭 열심하다는 신자? 밭, 소, 아내가 있는 처음에 초대받았던 부자들 중에는 하느님나라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길과 골목, 길거리 등 시내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울타리 곁에 서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하느님은 잊지 않고 맨 처음 부르실 것이다. 추기경, 주교, 신부, 수녀 등 처음에 초대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느님나라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무시당해온 평신도, 무신론자 중에 맨 처음 초대받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쿰란 공동체처럼 위계질서가 엄격한 곳에서는 식사 자리를 해마다 시험을 치러 교체했다(Bovon, III/2, 488). 한국에서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학년이 높은 순서로 식당에 먼저 입장하고 퇴장하던 장면을 나는 잊지 못한다. 성당에도 학년 별로 자리가 배정되었다. 미사 후 퇴장 때에도 고학년부터 먼저 퇴장했다. 그런 모습에 나는 좋은 인상을 받진 못했다. 아직도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독일 신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이, 학년, 서품 연도 그런 숫자가 무슨 벼슬이나 권력일까. 한국 가톨릭과 사제들의 머리에서 ordo라는 단어를 어서 지우고 버려야 한다. 그래야 가톨릭 개혁이 가능해지고 성직자중심주의라는 늪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순서ordo, 그것은 하느님나라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껍데기에 불과하다. 종교에 그리스도교에 무슨 벼슬이 있는가. 말로만 봉사, 봉사 하지 말고 신학교 교육부터 봉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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