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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73 : 예수 제자 되는 조건
  • 김근수
  • 등록 2017-06-06 10:17:25
  • 수정 2017-06-06 10: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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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예수께서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27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28 “여러분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29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30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 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32 만일 당해 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입니다. 33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34 “소금은 좋은 물건입니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습니까? 35 땅에도 소용없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어 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루카 14,25-35) 



오늘 본문 루카 14,15부터 18,30까지 한 묶음의 성서 부분이 이어진다. 예수 여행기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예수는 예루살렘 최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폭풍 전야처럼 긴장감이 가득한 부분이겠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사람들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별로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 해야 한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한번, 그 다음 제자들에게 한번, 이런 식으로 교대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디서 이야기했는지 특정한 장소가 드러나진 않는다. 길에서, 길 위에서, 걸으면서 하는 이야기다. 프란치스코 교황 말처럼 신앙은 길을 걷는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신앙이란 하느님 찾아 동료들과 함께 같은 길을 걷는 일이다.


▲ ⓒ 최진


앞부분에서 예수는 여러 예화를 통해 제자 되기를 요청했다. 이제 강력한 경고를 통해 진짜 제자가 무엇인지, 가짜 제자는 누구인지 설명하고 있다. 예루살렘 도착 전에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단단히 훈계하는 것이다. 전투에 나가기 전에 정신교육을 철저히 하는 것일까. 예수 심정은 착잡하고 비장하다. 예수와 일행은 예루살렘에 더 가까워졌다. 루카 7,11 이후 독자들은 예수에게 많은 군중이 동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루카 8,4; 9,11, 18,36). 단순한 동행으로 제자 되는 것은 아직 아니다. 


야곱은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했다(창세기 29,30-33).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말라기 1,2).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사람은 누구를 택하고 누구를 택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예수 제자로 선택될 것인가. 12제자만 제자인 것은 아니다. 12제자만 제자로 여겼다면 예수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25절 동행하던 군중은 거의 예수 제자에 가깝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 동행하는 군중이라면 그 각오는 대단하겠다. 예수에게 호감을 가진 군중임에 틀림없다. 이미 예수에게 온 군중에게 예수는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예수는 세 가지를 요구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가 군중에게 면접시험을 하는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친 예수가(루카 10,25-28) 느닷없이 26절에서 미움을 권하고 있다. 주저하지 말고 곧장 따르라고(루카 5,27-28) 다그치던 예수가 28-32절에서 차분히 앉아 곰곰 생각 좀 하라고 타이르고 있다.  


예수에게 다가오는 것으로는 예수 제자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루카 5,30-32). 자신의 과거와 단절까지 해야 한다. 아내를 포함해서(루카 18,29) 부모, 자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라는 말이다. 마태오에 아내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었다. 아내를 미워하라니? 결혼하지 않은 예수였다고 해도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부모와 자녀를 미워하라니, 그것은 유다교에서 돌에 맞아 죽을 범죄에 해당한다. 형제자매를 미워하라니, 예수는 가정 파괴범인가. 


예수는 돌직구를 사용하고 과장법을 즐겼다. 아무리 문학적인 표현이라 해도 그렇지, 예수는 말을 좀 심하게 하는 스타일이다. 욕설도 저주도 삼가지 않았다. 루카는 제자 되는 조건과 범위를 마태오보다 더 가혹하게 확장했다. 마태오는 가족관계를 예수 제자 됨과 비교하는 정도였지만, 루카는 아예 반대되는 것으로 놓아버렸다.


그래도 좀 더 설명이 필요하겠다. 십계명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우선적으로 첫째 계명으로 강조했다. 가족은 이기적으로 운용되면 우상이 될 수 있고 하느님에게 적대적인 단위로 변질될 수도 있다. 가족이기주의는 우상이요 사회악이다. 레위족은 하느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가족을 떠나야 했다(신명기 33,9-10).


십자가는 페르샤 지역에서 유래한 것 같다. 팔레스티나에도 알려졌고 로마 군대가 유다인 독립투사들을 처형하는 용도로 썼다. 예수 시대 앞뒤에도 로마 군대에 무력으로 저항하던 많은 바리사이파와 젤로데파 유다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예수만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세로 기둥은 사형장에 이미 설치되어 있고, 가로 기둥patibulum은 사형수가 사형장까지 몸소 지고 가곤 했다. 젤로데파 유다인들을 함부로 업신여기는 설교자들이 있다. 일본 식민지 때 독립투쟁하던 선조들을 우리가 우습게 볼 수 있는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두 번째 요구 말씀에서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라는 끔찍한 처형 방법을 언급하여 군중에게 충격을 주려는 뜻은 아니다. 그 정도로 엄청난 진정성을 요구하는 말이다. 예수 제자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 ⓒ 곽찬


28-30에서 예수는 건축가 출신답게 망대 짓는 비유를 꺼냈다.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 건축가를 언급하며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 제자를 비판하는 것이다. 31-32에서 예수는 전투 준비하는 왕의 비유를 꺼내고 있다. 페르샤 군대, 마케도니아 군대뿐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민수기 1,16)도 만 명 단위로 부대 단위를 구분했다(Bovon, III/2, 542). 하늘의 군대도 그렇게 여겨졌다(요한묵시록 5,11). 


예수에게 군사 지식이 있었던가. 로마 군대에 저항하던 젤로데 게릴라 독립군을 예수가 몰랐을 리 없다. 젤로데 독립군은 예수 고향 갈릴래아에 근거지를 두고 있지 않은가. 33절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에서 루카의 특별한 관심사가 드러났다. 재산을 포기함은 루카가 여러 번 강조하였다(루카 5,11.28; 12,33; 18,22; 사도행전 2,44; 4,32).  


소금이 짠맛을 잃다니? 소금이 화학적으로 짠맛을 잃을 수는 없다. 당시 소금은 오늘날 소금보다 훨씬 적은 양의 나트륨 성분이 포함되었고 마그네슘 등이 많이 섞였다고 한다(J. Jeremias, Gleichnisse, 169). 잘못 보관하거나 다른 불순물과 섞이면 소금은 생선을 보존하거나 맛을 내는 재료로 쓰일 수 없다. 더 이상 쓸 수 없어 내버릴 수밖에 없다는 말은 무서운 심판(마르코 9,50; 마태오 5,13)의 경고이다. 


쓸모없는 제자는 심판받는다는 뜻이다. 세례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쓸모없는 제자는 내버릴 수밖에 없다. 짠맛을 잃은 성직자도 많고 짠맛을 잃은 평신도도 많은 시대다. 착한 목자는 적고 악한 목자는 많은 우리 시대다.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라는 예수의 말에서 슬픈 오해와 사례가 그리스도교 역사에 많이 생겼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진리의 서열 또는 교리의 순서Hierarchie der Wahrheiten라는 말이 새로 생겼다. “가톨릭 교리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11) 여러 교리 사이에 중요성과 순서에 차이가 있다는 가르침이다. 시대가 변해도 바꿀 수 없는 교리가 있고, 시대에 따라 변경 가능한 가르침이 있다는 말이다. 


유일신, 삼위일체 교리 등 하느님에 대한 교리와 교회, 성사, 마리아에 대한 교리가 동등한 비중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개신교와 대화할 때 이 원칙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중요한 교리에는 공통점이 많고 덜 중요한 교리에는 차이가 있는 편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차이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진리의 서열이라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 제자 되기가 1번이고 나머지는 다음다음 문제라는 뜻이겠다. 여기서 미워하라는 말은 예수 제자 되기보다는 덜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이다. 이혼을 부추기거나 가족관계를 외면하라는 말은 아니다. 가족에 대한 인연이 예수 제자 됨을 방해하지 않도록 마음가짐을 하라는 격려다. 


가족보다 예수 제자 됨이 더 중요하다. 죽음과 가난을 각오하라. 이 세 가지가 예수 제자 됨의 조건이다. 예수는 이 조건을 직접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예수 생전에 제자들과 군중에게 남겼던 여러 짧은 이야기들을 복음서 저자들은 모으고 편집하고 확장했다. 바리사이들에게 거절당한 추억을 예수 제자들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신자들에게 교리교육과 신자교육에 활용했다. 21세기 우리도 초대교회 신자들과 상황이 다르지 않다.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를 묵상해야 하겠다. 가족보다 예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예수를 따르면서 죽음과 가난을 각오하고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교회 재산도 버려야 한다. 추기경, 주교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라. 추기경, 주교들은 언제 한번 죽음과 가난을 각오한 적 있는가. 목사와 신부들은 언제 한번 죽음과 가난을 각오한 적 있는가. 추기경, 주교들은 교회 재산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맛이 간 신부들이 적지 않다.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곧 버려질 소금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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