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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77 : 가난과 하느님 나라
  • 김근수
  • 등록 2017-07-04 11:33:52
  • 수정 2017-07-05 16: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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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다. 15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분은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보를 다 아십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16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17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율법은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8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며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19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20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21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습니다.


22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23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24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25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26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27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28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30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습니다. 31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루카 16,14-31)

 



돈을 좋아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란 말은 그리스에도 있었다. 데모크리토스, 디오게네스도 그런 말을 했다. 바리사이파들이 사람들 앞에서(루카 10,29) 옳은 체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진다(사무엘상 16,7; 열왕기상 8,39; 테살로니카전서 2,4). 


돈을 좋아하는(루카 20,47)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사실 정확하진 않다. 이 말은 바리사이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해야 옳았다. 루카복음에 여기에만 있는 말이다. 바리사이들은 가난이 아니라 부유함이 하느님 축복의 표시라고 여겼다. 사두가이는 경제와 종교에서 권력층이자 상류층이었다. 초대교회가 당시 주요 경쟁자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의식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훌륭해야 한다는 다짐을 초대교회 사람들이 각오하는 말이다. 


14절에서 바리사이들은 왜 예수를 비웃었을까. 율법과 성서를 예수보다 잘 알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비웃었다는 단어를 루카는 루카 23,35에서도 다시 썼다. 예수는 바리사이보다 율법과 성서를 잘 몰랐을까. 성서와 신학 지식과 정보를 남들보다 좀 더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에 분명히 있다. 신학 지식과 정보를 좀 더 안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권력과 지위를 독점하고 있는 현상은 사실 큰 문제다. 아는 사람이 꼭 권력을 차지해야 하는가. 아는 사람이 더 겸손해야 하지 않나. 그들은 교만해서는 안 된다.


15절에서 예수는 바리사이들의 돈 욕심을 직접 비판하지는 않았다. 대신 바리사이들이 스스로 옳은 체하는 문제를 건드렸다(루카 11,39.42; 18,9). 사람의 마음을 다 아는 하느님에게 스스로 옳은 체하는 것은 맘몬을 숭배하는 것처럼 가증스러운 일이다(다니엘 9,27; 마르코 13,14). 15절을 성서신학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교 신자, 성직자, 수도자 모두 무릎 꿇고 참회해야 하겠다. 성서가 비판하는 사람들, 행동을 사실 우리도 이미 해오고 있지 않은가. 내가 성서를 해석하기도 하지만 성서가 나를 해석하기도 한다. 그 두 방향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진짜 성서공부다.  


성서에서도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그리스도교를 높이기 위해 유다교를 깎아내리는 버릇이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 부족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위선자,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초대교회가 폄하해선 사실 안 되었다. 당시 초대교회 사정이 평안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금 우리가 충분히 감안해도 말이다. 이웃 종교를 악마처럼 여긴다고 해서 내 종교가 저절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내 종교의 진면목을 사람들과 역사 앞에 행동으로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16절은 루카복음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로 성서학자들은 꼽고 있다. 루카가 왜 16절을 이곳에 배치했는지도 의아하다. apo tote 해석이 우선 까다롭다. 이 단어는 루카복음에는 여기에만 나오고 마태오는 4,17, 16,21, 26,16에 썼다. 요한 때까지 또는 요한 때부터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나는 Conzelmann(Mitte der Zeit, 17), Wolter(Wolter, 554) 의견처럼 ‘요한 때까지’를 선택하겠다. 마태오는 하느님나라 선포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마태오 3,2). 그러나 루카복음에서 하느님나라 선포는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시작되고 있다(루카 4,43; 8,1; 9,60). 


세례자 요한을 보는 눈에서 마태오와 루카는 조금 다르다. 마태오는 율법의 완성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여겼다. 루카의 생각에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보다 더  뛰어났다. 옷과 음식을 남과 나누어 먹고(루카 3,11)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루카 3,14),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루카 12,33) 가르친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예수는 훨씬 뛰어넘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의 메시지를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해도,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 중 일부라도 제대로 실천하고 있을까? 로마제국의 정치적 복음에 맞서 예수는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 부분은 신학에서 제대로 강조되고 있지 않다.


17절은 율법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주장을 물리치고 있다. 율법은 글자 그대로 근본주의식으로 해석되지는 말아야 한다. 율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완성(마태오 5,17)되어야 한다. 글자에 메이지 않고 정신을 살린다는 말이다. 17절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성서근본주의자들에게도 주는 경고로 사용되어도 좋겠다. 


18절은 루카 두 작품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당시 유다교 토라(모세오경)에 대한 해석을 예수가 비판하는 사례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겼던 유다교의 통념에 따르면, 이혼은 남성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정도로 해석되었다. 남성이 이혼장(신명기 24,1)만 써주면 이혼이 가능했다. 여성은 이혼장을 쓸 권리가 없었다. 여성은 이혼을 당할 위험은 있어도 이혼을 결행할 권리는 없었다. 


▲ (사진출처=MBC드라마 갈무리)


예수는 이에 반대하고 남녀의 인격적 결합을 강조하여 이혼장을 근거로 재혼하던 풍습을 거부했다. 이혼을 재산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 아니다. 구약성서(공동성서)에서 이혼한 사람들의 재혼을 원천적으로 금지한 구절이 있는지 성서학자들이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사제들과 대사제는 과부와 결혼이 금지되었다(레위 21,7). 초대교회에 와서 비로소 과부와 이혼자의 재혼이 구분되었다(Wolter, 556).


모든 율법을 원래대로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룹은 야고보를 중심으로 뭉쳤다(갈라디아 2장; 사도행전 15장). 세례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바오로 주위에 모였다(로마 7,1-4). 루카는 마태오 5,17을 이어받아 중도 노선을 걸었다(Kremer, 165). 예수는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율법 정신을 충실히 따랐다고 루카는 마태오처럼 생각한 것이다. 


라자로는 하느님이 도와주신다는 뜻이다. 그 이름은 당시 흔했다(창세기 15,2; 요한 11장).거지 라자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유다교 해석에 따르면 라자로가 이미 하느님 곁에 있다(마태오 8,11; 루카 13,28; 20.37).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듯이 예수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품에 안고 있다. 부자는 죽은 뒤 아브라함과 세 번 대화한다. 부자는 첫 대화에서 거지 나자로를 자기에게 보내어 고통을 줄여달라고 호소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의 고통을 줄여줄 능력이 있다는 천기를 부자는 누설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답변은 인과응보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부자는 살아서 온갖 복을 다 누렸으니 고통을 받는 것이다.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었으니 이제 위안을 받는 것이다. 세상의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답변을 두고두고 새겨야 한다. 


부자는 자신의 살아있는 다섯 형제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부탁한다. 부자 자신의 구원은 포기했지만 다섯 형제라도 올바른 삶을 살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다섯 형제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을 경청하면 된다고 답했다. 부자들이 몰라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다섯 형제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에게 호소한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부활 사상도 소용없다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의 답변을 다시 정리해보자. 1. 부자는 살아서 온갖 복을 다 누렸으니 죽어서 고통을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살면서 온갖 불행을 겪었으니 죽어서 위안을 받는다. 2. 사는 동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3. 부활 사상을 받아들인다 해도 사는 동안 예언자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예수는 부자들에게 회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서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니, 살면서 온갖 불행을 달게 겪으라는 말은 아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편을 준 적이 없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깨우치고 의식화하기 위해 온갖 방법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돌아온 아들의 비유처럼 아름다운 비유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질문이 떠오르는 비유다. 부자에 대한 아브라함의 차가운 태도와 그리스도교의 자비는 모순되지 않는가? 천국은 비유에서 사실대로 소개된 것인가? 이집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21세기를 사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본문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소유욕은 예수 따르기에 커다란 장애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잘못을 버려야 하겠다. 돈 숭배와 여성 차별은 오늘도 그리스도교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유령이요 악마다. 돈을 마음속으로 경배하고 여성을 사실상 차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돈 숭배와 여성 차별은 예수를 따르는 데 장애물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예수는 바로 앞 단락에서 말했었다(루카 16,13). 19-31절은 부자에 대한 예수의 비판이 가장 잘 묘사된 이야기다. 본문에서 여러 특징이 보인다. 부자의 사치스런 모습은 짧게 보도되었고, 가난한 사람의 고통은 길고 자세히 소개되었다. 부자의 죽음은 길고 자세히 소개되었고, 가난한 사람의 죽음은 짧게 보도되었다. 부자는 이름이 없고, 가난한 사람의 이름은 있다.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않는데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 자체에도 관심이 없는 신자유주의 세상 아니던가.



성서 독자들과 그리스도인은 부자를 비판하는 말이나 이야기가 성서에 왜 그리 자주 나오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 당시 유다인들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이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깨닫지 못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당시 유다인들과 초대교회 사람들과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두 이유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교회도 성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했지만, 교회는 부자를 선택하고 있다. 부자와 권력자를 선택한 성직자들은 여전히 많다. 


비유에서 부자와 라자로는 서로 모르고 만난 적도 없다. 실제 세상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만날 일이 없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다른 세상인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산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서로 없는 존재처럼 여기고 사는 것인가. 그 점이 나는 아주 슬프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종교도 예수도 다르게 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 종교는 죄가 아니라 불평등을 제일 주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죄도 불평등도 다르게 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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