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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78 : 죄와 용서, 믿음과 봉사
  • 김근수
  • 등록 2017-07-11 11:41:33
  • 수정 2017-07-11 14:3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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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악의 유혹이 없을 수 없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2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3 조심하시오. 당신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시오. 4 그가 당신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당신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니까 6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7 “여러분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합시다.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하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8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습니까? 9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10 여러분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시오” (루카 17,1-10)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어 제자들에게 주는 넘어짐, 용서, 믿음, 봉사 네 말씀이 이어지고 있다(루카 16,14-18). 신자 개인의 책임과 봉사를 기초로 서로 용서하고 믿음을 격려하는 공동체 삶이 주제다. 믿음에서 넘어짐은 초대교회의 큰 주제였다. 사도 바오로는 “형제자매를 넘어뜨리거나 죄짓게 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합시다”(로마서 14,13)라고 이미 말하고 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남의 믿음을 흔들리게 유혹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한 말이다(루카 7,23; 마태오 24,10-). Skandalise는 ‘죄짓게 하는’ 보다 ‘넘어지게 하는’으로 번역하는 게 더 좋았다. Skandalon은 원래 짐승을 잡는 덫에 놓는 나무 또는 덫을 가리킨다(Wolter, 565). 가나안 백성(판관기 2,3), 식사율법을 어김(유디트 12,2), 우상숭배(호세아 4,17)가 덫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신앙심이 아직 두텁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루카 공동체에서 믿음이 단단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뜻이 있다.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나을 것이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아무리 의도가 좋고 명분이 훌륭하다 해도 예수가 이렇게 험한 말을 했다는 말인가. 서투른 방법이 선한 의도를 훼손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명분으로도 욕설이나 저주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핀잔을 예수는 들어야 하는가. 유명한 사람 중에서도 말이 험하기로 손꼽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무리 보아도 예수다. 


역대 교황 중에서 거친 말을 서슴지 않는 교황은 누구일까. 아무리 보아도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강론자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151) 사기꾼, 협잡꾼이라는 단어를 공식 문헌에 쓰는 교황을 나는 살다 살다 처음 보았다. 


조선일보에게 딱 걸릴 말이 한둘이 아니다. 예수 당시 조선일보나 매일신문이 없어 천만다행이었다. 엘살바도르에서 독재정권과 싸우는 국민들이 쓰던 저항 방법 중 하나는 성당 점거였다. 미사를 드리는 성당을 기습 점거하여 출입문을 잠갔다. 본당 신부는 그들과 같이 성당 안에서 지내고 미사를 함께 바쳤다. 로메로 대주교는 방문하여 사람들과 대화하고 대통령에게 전화하거나 직접 만나 사람들의 억울함을 전했다. 성당 점거는 여러 번 일어났다.


▲ 3월 22일, 희망원대책위 활동가 30여 명은 교황 선출 기념미사가 봉헌되고 있던 명동성당에서 구호를 외치고, 현수막을 펼쳐들며 기습시위를 진행했다. (사진출처=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구희망원 사태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주교들에게 항의하는 시위가 얼마 전 명동성당 미사 중에 벌어졌다. 김희중 대주교는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성당을 점거했던 사람들에게 로메로 대주교는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국 종교인들은 말이 너무 부드럽다. 비판해야 마땅할 세력과 조직과 사람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가. 


예수는 축복의 말도 했지만 저주의 말도 했다. 저주는 심판을 포함한다(루카 6,24-26; 22,22-). 예수가 저주의 말도 했다는 사실을 잊는 사람이 많다. 저주받는 사람과 이유를 예수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주할 때 예수의 말은 유난히 길어지고 언어가 험악해진다. 


1절을 우리 시대에 맞추어 고쳐보자. 예수는 믿음이 약한 평신도에게 죄짓게 하는 성직자는 불행하다고 경고한 셈이다. 평신도에게 믿음을 강하게 하도록 권면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성직자들이 오히려 평신도가 죄 짓도록 유혹하는 일은 없는가. 한국 신부들은 평신도에게 신앙의 모범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가. 골프장에서 노닥거리는 신부들에게 묻고 싶다. 3절 ‘조심하시오’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루카복음에만 나온다(루카 12,1; 21,34; 사도행전 5,35).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형제자매의 잘못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으라고 권하고 있다. 꾸짖을 때 용서할 준비를 하라는 부탁이다. 용서할 마음이 없이 비판하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3절에서 ‘뉘우치거든’ 부분은 마태오에는 없다. 꾸짖는 방법에 대해서는 루카는 언급하지 않았다. 


▲ ⓒ 최진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다. 하루에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곱 번은 ‘충분히, 많이’라는 뜻이다. 용서는 새 출발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루카 11,4; 18,23-35). 그러나, 좋은 의도에서 조언한다고 해서 적절한 조언 방법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좋은 의도에서 이야기했는데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조언하는 사람의 착한 뜻을 조언 받는 사람이 오해할 수도 있다. 부드러운 조언 속에 복잡한 의도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 조언은 쉬운 게 아니다. 조언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조언은 하고 싶고, 훈계는 듣기 싫은 게 우리 인간 아닌가. 


뉘우치지 않는 형제자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도 5·18 희생자라고 우기는 전두환을 그리스도인은 용서해야 하는가. 독일에서는 히틀러에 대한 비판 없는 책은 출판조차 금지되고 있다. 전두환 회고록이 서점에서 뻔뻔스럽게 팔리는 한국이다.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사람도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어야 하는가. 누구에게나 곤혹스런 질문이겠다. 


5절에서 사도들이 공동체를 대표하여 예수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고 있다. ‘저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언제나 기도하자. 기도에 대해 분석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자. 음식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음식을 먹는 것이다. 운동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운동하는 것이다. 인생론 책을 쓰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살아가고 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예수의 표현에서 제자들은, 우리들은 불쾌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게 겨우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니.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의 부탁에 예수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마태오는 산(마태오 17,20) 이야기를 했는데, 루카는 뽕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뽕나무는 뿌리가 아주 깊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뽕나무를 뿌리째 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을 과장하고 과신하는 버릇이 있다. 내 믿음의 1/10 정도만 진짜 믿음이라고 해도 천만다행일 것이다. 우리 기도의 90%는 가짜 기도일 것이라고 칼 라너는 말한 적 있다.



산은 둘째 치고 뽕나무부터 뽑으라는 말이다. 믿음의 힘을 소박하게 여기라는 루카의 교훈이다. 뽕나무 비유를 듣던 제자들의 심기가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예수 제자들보다 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이미 줄줄이 등장했던 것이다(루카 5,19-; 7,9-; 8,28). 자기보다 더 믿음이 깊은 평신도를 흔쾌히 인정하는 성직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평신도의 믿음에서 즐거이 배우는 성직자가 얼마나 될까. 


아주 어려운 사례를 들어 기도의 힘을 강조하는 예수다(마르코 11,23; 코린토전서 13,2). 기도의 힘은 엄청나다. 하느님의 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기도의 힘에 대해 말했지만 올바른 기도에 대해 여기서는 말하지 않았다. 올바르지 않은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기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에 가득한 기도는 무효다. 


7-10 이야기는 루카에만 나온다. 7절은 주인들이 종을 함부로 대하던 당시 통념과 아주 다른 내용의 발언이다. 종을 부리던 사회 체제를 예수가 용인하고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노예 윤리를 그리스도인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사회제제라는 전제에서 볼 때, 예수 제자들은 당시 종들이 하던 마음가짐을 하라는 말이다. 종은 오늘 성직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교황뿐 아니라 모든 성직자는 우선 종이다. 말로만 종이 아니라 진짜 종으로 살아야 한다. 말로는 종이고 실제로는 귀족인가. 예수 제자들은 겸손하라는 뜻이다. 


평신도는 겸손하고 성직자는 지휘하라는 말이 아니다. 평신도와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겸손하라는 말이다. 성직자들이 특히 겸손해야 한다. 평신도에게 겸손교육을 할 필요는 사실 없다. 평신도는 이미 겸손할 대로 겸손해져서 비굴하기까지 하다. 겸손교육은 성직자들이 받아야 한다. 


죄의 유혹이 아니라 죄악의 유혹을 말하고 있다. 죄는 강조하고 악은 외면하는 그리스도교의 잘못된 풍토를 우선 지적해야 하겠다. 죄가 악을 낳기도 하지만 악이 죄를 낳기도 한다. 죄보다 악이 더 크고 무섭다. 대부분 죄는 악에서 생긴다. 

 

믿음의 힘은 초능력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사랑의 힘, 정의의 힘을 가리킨다. 사랑의 힘을 믿지 않는 세태가 분명 있다. 정의의 힘을 비웃는 세상이기도 하다. 사랑의 힘, 정의의 힘을 믿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힘을 믿으려는가. 돈의 힘? 폭력의 힘? 돈과 폭력으로 무엇을 이루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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