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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79 : 치유된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의 감사
  • 김근수
  • 등록 2017-07-18 11:06:08
  • 수정 2017-07-18 13: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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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14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여러분의 몸을 보이시오” 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16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습니까? 18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입니까!” 하시면서 19 그에게 “일어나 가시오. 당신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17,11-19) 




치유된 나병환자 열 사람에게 집중해야 하는가, 감사함을 표시한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에게 눈을 돌려야 하는가. 병을 고친 예수의 능력이 주제인가, 예수에 대한 나병환자 열 사람의 믿음이 주제인가. 첫 부분의 믿음이 중요한가, 마지막의 감사가 중요한가. 유다인들이 싫어했던 사마리아인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예수는 왜 루카복음에서 두 번이나 꺼내는가. 본문은 나병환자를 고친 이야기(루카 5,12-14)뿐 아니라 백인대장의 종을 고친 이야기(루카 7,1-10)를 떠오르게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루카 9,51; 13,22; 18, 31).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지명이 뒤바뀌었다. 11절 dia meson은 번역하기 까다롭다. 사이, 통하여 또는 따라서를 뜻한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 갈릴리아에서 페레아 지역을 거쳐 요르단강 다른 편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요한 4,9). 그 길은 상당히 험하다.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가장 편하다. 루카는 “유다, 갈릴래아, 사마리아”라고 지리적으로 정돈되지 않은 순서로 말하기도 했다(사도행전 9,31).


갈릴래아를 떠난 예수 일행은 먼저 사마리아(루카 9,52; 10,33-)를 지나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좌우간 루카는 이스라엘 지리를 잘 모르는 것 같다(Conzelmann, Mitte der Zeit, 6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임을 독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소풍가거나 순례하는 여정이 아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고 있다. 우리는 이솝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최후의 일기를 읽는 것이다. 


열 사람(루카 5,14-)은 열 처녀처럼 많은 숫자(마태오 25,1)를 나타낸다. 멀찍이porrothen 소리쳤다는 말은 나병환자들이 사람들 가까이 오면 안 된다는 규정을 지킨 것이다(레위기 13,46; 민수기 5,2). 크게 소리쳤다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루카에만 나온다(루카 17,13, 사도행전 2,14; 14,11). 큰소리로 하느님께 하소연도 하고 감사도 드린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말은 우리가 평생 기쁘게 할 말이다(시편 40,5; 50,3-4; 이사야 33,2). 자비로운 눈길은 하느님의 특징이다(탈출기 3,7; 시편 32,13-19).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눈길(루카 10,33), 돌아온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눈길(루카 15,20)은 자비롭다. 예수의 눈길, 프란치스코 교황의 눈길도 자비롭다. 자비로운 눈길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루카 5,25; 7,16; 13,13) 하면서 예수께 돌아와(열왕기하 5,15) 발 앞에 엎드려(루카 8,39) 감사를 드렸다. 그 순서가 중요하다.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에게 돌아온 것이지 예수에게 돌아온 이후에 하느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다. 


시리아 나병환자 나아만이 치유된 후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온 이야기를 루카는 기억하고 있다(열왕기하 5,15-). 시리아, 그 이름만 들어도 나는 눈물이 난다. 시리아 내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는가. 시리아, 그 땅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말이다. 


만났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인생은 곧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 Apantesis만남은 루카 시대에 특별한 뜻을 지닌 단어였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 쓰인 단어였다(마태오 25,6; 테살로니카전서 4,17). 나병환자 열 사람은 마치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듯 살아있는 예수를 축복처럼 만난다는 뜻이다. 나는 내 생에 예수를 만난 것이 너무도 기쁘고 행복하다. 


군중이 아니라 치유 받은 사람 본인이 하느님을 찬양한다고 가장 많이 보도한 사람이 루카다(루카 5,25; 13,13; 18,43). 치유 받은 사람이 자존감을 다시 찾고 자기표현을 하는 것이다. 병에서 해방된 것 뿐 아니라 인간 자존심을 회복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껏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루카는 격려하고 있다. 치유보다 자존감 회복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의미 있고 중요하지 않을까. 


큰소리로 하느님께 하소연도 하고 감사도 드린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 한번 세상에서 큰소리로 외치며 살 수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마음껏 목소리를 내도록 누가 격려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여, 저희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외치는 것 같다. “성직자들이여,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큰소리로 외치는 것 같다. 


한자로 들을 청聽자를 자세히 보자. 왕의 귀, 즉 큰 귀를 가지고 열 개의 눈으로 한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이다. 들어라 교회여. 가난한 사람들의 소리를. 루카는 해방신학자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인간 대접을 받도록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있다. 


예수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근처 동네에서 사는 사제들에게 보낸 것 같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제들에게까지 먼 길을 가도록 부탁할 예수가 아니다. 아주 드문 기적적인 치유에 사제들의 확인이 필요했다(루카 5,14). 치유 받은 나병환자는 다시 동네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살 수 있으려면 사제의 공식 치유선언이 필요했다. 사람들 속에 같이 살지만 마치 없는 사람처럼, 필요 없는 존재처럼, 가족과 사회에 부담처럼 여겨지는 병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오늘 중요하겠다. 


18절 allogenes이방인(외국인) 단어가 중요하다.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는 사마리아 사람을 가리키는데 쓰이지 않았다(Wolter, 574).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입니까?”라고 예수는 탄식하고 있다.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 예수에게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에게서 예수를 거절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를 연결하고 있다. 외국인은 예수를 받아들이는데 동족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아쉬움 말이다. 



19절에서 예수에게 돌아온 사실이 믿음으로 인정되었다. 감사함이 없는 믿음은 기적을 바라는 믿음에 그칠 뿐 아직 진짜 믿음은 아니다. 기적 이야기나 놀라운 사건의 끝에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대목을 루카는 즐겨 배치했다(루카 2,20; 7,16; 23,47). 감사할 줄 모르면 아직 인간이 아니다. ‘일어나 가시오’라는 단어는 루카만 썼다(사도행전 10,20; 22,10). 복음전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사마리아를 거쳐 온 세상으로 퍼진다(사도행전 1,8; 8,1; 9,31).


누가 하느님을 진짜로 존중하고 경배하는지를 두고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인들은 오래 경쟁해 왔다(루카 9,52-; 10,30-35). 본문을 유다인이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왜 하필 사마리아인을 좋은 사례로 들었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본문을 사마리아인이 읽는다면 어떤 느낌을 가질까. 지역 차별을 거부하는 예수에게 감동받을지 모르겠다. 


본문을 한국 가톨릭 신자가 읽는다면?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갈등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 차별, 지역 차별, 인종 차별은 악이다.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성도를 차별하는 것은 죄다. 개신교 성도가 가톨릭 신자를 차별하는 것은 죄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이슬람 신도를 차별하는 것은 죄다. 


누가 하느님을 진짜로 존중하고 경배하는지를 두고 오늘 누가 경쟁하고 있는가?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그리스도교와 이단? 대형교회와 이단? 입으로 말로는 아무 소용없다. 예수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실천으로 더 잘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 입이나 말로는 우리는 벌써 천국에 수백 번 도착했다. 


본문의 주제는 믿음과 감사의 관계다. 그런데 교회 역사에서 본문은 선행 없는 구원을 강조하고 인용하기에 딱 좋았다. 루터는 선행을 통한 구원을 비판하기 위해 본문을 즐겨 인용했다(WA, 355). 선행을 통한 구원이냐,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냐라는 주제와 아무 관계없는 단락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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