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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80 : 하느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
  • 김근수
  • 등록 2017-07-25 13:09:05
  • 수정 2017-07-25 15: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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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21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22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사람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날을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입니다. 23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보아라, 저기 있다’ 혹은 ‘여기 있다’ 하더라도 찾아 나서지 마시오. 24 마치 번개가 번쩍하여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환하게 하는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그 날에 그렇게 올 것입니다.


25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은 먼저 많은 고통을 겪고 이 세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26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는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바로 그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마침내 홍수에 휩쓸려 모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28 또한 롯 시대와 같은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하다가 29 롯이 소돔을 떠난 바로 그 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리자 모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31 그 날 지붕에 올라가 있던 사람은 집 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오지 마시오. 밭에 있던 사람도 그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32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보시오!


33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입니다. 34 잘 들어두시오.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35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37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주님,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루카 17,20-37)



20-21절을 22-37절과 함께 다루어야 하느냐 마느냐 문제로 성서학자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다. 20-21절 주제는 하느님 나라이고 논의 상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22-37절 주제는 사람의 아들이고 대화 상대는 제자들이다. 20-21절은 루카복음에만 나온다. 하느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이라는 두 주제를 여러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단락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에게 또한 관심을 가졌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마르코 13장을 근거로 최후의 날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 루카복음 17장 20-37절을 학자들은 작은 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2-37절은 앞부분과 독립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간과 공간 개념이 전체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다. 바리사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20-21), 제자들에게 하는 예수의 예언(22-35),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격언(37)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의 대화상대로 등장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가 오는 구체적인 시점과 기한을 물은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징조를 물은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종말론적 사건 앞에 구체적인 표징이 미리 나타난다는 생각이 고대에 있었다(Wolter, 575).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알리는 징조는 없다고 20-21절에서 분명히 답변했다.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징조를 가리킨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하느님 나라와 다가옴이 서로 연결되어 다룬 곳은 없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이른바 메시아 기대가 예수 시대에는 여러 가지 있었다(루카 11,2; 사도행전 1,6). 자연 현상과 역사적인 사건에 근거하여 때를 예측하는 유행을 예수는 분명히 거절했다(루카 11,6; 21,25-).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오느냐는 장소도 예수는 고정시키지 않았다(마르코 13,21). 예수의 등장과 함께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entos 있다는 것만 말했다(루카 10,9-; 11,20; 16,16). 


Entos hyumon이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안에, 아래, 에게” 세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여러분 마음속intra vos(라틴어 번역본 Vulgata)으로 옮기는 것은 바리사이들의 질문이나 루카의 생각과 어울리지 않는다(Kremer, 171). ‘여러분 각자 안에서’ 보다 ‘여러분 공동체 안에서’라고 많은 성서학자들은 번역하고 있다(Bovon, III/3, 167). 하느님은 공동체 안에 계신다는 구약의 하느님 백성 신학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다(신명기 30,11-14; 탈출기 17,7; 34,9).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활동에서 드러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Wolter, 576). 무작정 미래만 바라보지 말고,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주목하라는 당부가 여기서 핵심이다.  


두 번째 부분인 22-37절에서 오다, 보다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주제가 바뀌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오느냐는 주제다. 예수는 설명을 바리사이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고 있다. 23절 사람들이 누구인지 뚜렷하지 않다. 예언자들이나 자칭 메시아들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예수 재림을 언급하던 초대교회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다. 


24절은 번개처럼 시간적으로 갑자기 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볼 수 있게 온다는 말이다. 지구를 평평하게 생각했던 당시 상식에 근거한 표현이겠다. 어느 지역에서 생긴 번개를 둥근 지구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볼 수는 없다.  


25절에서 사람의 아들이 오는 조건이 설명되고 있다. 언제 오느냐가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 먼저 많은 고통을 겪고(루카 9,22; 24,26)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깨뜨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잘못된 기대(루카 19,11)에 찬물을 끼얹고는 고통의 중요성(사도행전 14,22)을 설명하고 있다. 


노아 이야기(창세기 6-9장: 베드로전서 3,20; 베드로후서 2,5)는 유다교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롯 이야기(창세기 19,1-29; 베드로후서 2,7)는 마태오복음에서는 없다. 노아 이야기와 롯 이야기는 갑작스런 종말을 기다리지 말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을 뒷받침하는데 자주 인용되었다.  


노아와 롯 세대가 여기서 죄인들로 언급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말이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하는 일이 죄에 불과하다거나 가치 없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31절 지붕에 올라간다는 말은 불안에 가득한 상태를 가리킨다(Bovon, III/3, 174).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은 롯의 아내처럼 지난날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아들을 통한 구원(테살로니카전서 1,10)에 의탁하라는 뜻이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 갑작스런 심판이 닥치리라는 말이다. 심판 때에 선택된 사람은 모아지고 다른 사람들은 멸망한다는 묵시론적 표현이 천사의 등장으로 전제되었다(마르코 13,27). 



34절은 여러 식구가 하나의 침대에 함께 자는 가난한 가정을 예로 들었다. 35절에서 맷돌질은 여인의 일이었다. 해진 후에 또는 해가 뜨기 전에 여인들은 밀을 맷돌에 갈곤 했다. 36절은 루카복음에서 비어 있다. 나중에 마태오 24,40을 여기에 끼워 넣었다. 마태오 24,40이 포함된 루카복음 성사 사본은 적다. 


37절에서 심판 장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알쏭달쏭한 속담 하나를 말하고 있다(에제키엘 39,17-20; 요한묵시록 19,17-). 고대 사람들은 독수리가 죽은 시체에도 손을 댄다고 생각했다. 독수리는 율법에서 불결한 짐승 명단(레위기 11,13-19; 신명기 14,13-18)에 속했다. 주검과 독수리는 여러 곳에서 인용되었다(하바국 1,8; 욥 9,26; 39,30). 새가 사람의 시신을 처리하는 조장 풍습이 조로아스터교에 있었다. 얼마 전 이란에 갔을 때 어느 산꼭대기에 움푹 파인 둥근 조장 터에 잠시 누워보았다. 지금 이란 당국은 조장을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본문의 여러 말씀을 실제로 예수가 했을까.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1. 날짜 계산을 하지 말라. 2.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오는 날을 끊임없이 기다리라. 여기서 오늘 우리가 얻을 교훈은 무엇인가. 충격적인 종말을 예측하지 말고, 일상을 두려움과 불안으로 지내지 말아야 한다. 


유다교는 현재적 천상적 하느님 나라를 지지했다(시편 47, 93, 96장). 유다인은 그러한 하느님 나라가 현실에 실현되기를 바랐다. 하느님 나라가 늦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유다교에도 공통 주제였다. 하느님 나라는 원래 유다교의 주제였다. 바리사이들은 유다교에서 핵심 주제를 여기서 예수에게 묻는 것이지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주장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갈릴래아 시절의 주제다. 사람의 아들은 예루살렘 가는 길과 예루살렘에서 주제였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pote 오겠느냐 물었다.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 어디서pou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 물었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를 주로 물어온 것 같다. 해방신학은 어디서를 주로 묻고 있다. 둘 다 중요하다. 나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보다 하느님 나라가 어디서 일어나겠느냐를 먼저 묻고 싶다. 


그동안 신학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문장에 주로 집중해왔다. 해방신학은 그 주장을 당연히 인정한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지금 기뻐하고,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강력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을 해방신학은 특히 강조하고 있다. 예수가 고난을 겪은 것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싸웠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과 싸우지 않는 사람에게 십자가가 주어질 리 없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언제 나타나느냐 하는 질문이 예수 시대와 초대교회에 아주 많았다. 그런 예측과 징조를 대담하게 제시하는 가짜 예언자들이 출몰할 위험도 당연히 많았다. 우리 시대에는 어떤가. 하느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에 대한 관심이 교회에 있기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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