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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81 : 과부의 간청과 죄인의 기도
  • 김근수
  • 등록 2017-08-01 10:44:39
  • 수정 2017-08-01 1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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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3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하고 졸라댔습니다. 4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으시오. 7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습니까? 8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9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14 잘 들으시오.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입니다.(루카 18,1-14) 




루카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절망과 싸우라고 예수는 요구한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부탁은 루카복음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루카 11,5-8; 22,40) 그만큼 기도에 대한 실망이 컸다는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는 오랜 시간 기도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주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기도에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받아들여진 기도보다 거절당한 기도가 우리에게 더 많을 것이다. 기도 지향이 잘못된 탓일 수도 있고, 간절한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도에 실망해도,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좋다. 기도하니까 인간이다. 


재판관이 악한 사람들의 대표로 등장했다. 불의한 재판에 대한 예수의 분노가 담겨 있는 이야기다. 예수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 부패한 사법부를 보고도 분노가 치밀지 않는다면, 아직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 한국에서 가장 악한 사람들의 대표는 누구일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당당히 들 수 있을 법조인이 한국에 얼마나 될까. 예수에 따르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법조인의 기본이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ekdikedon me. 백성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이다. 법조인들은 잘 들어라. 


이야기의 배경은 유다교 회당이나 성전이 아니라 도시다. 예수 당시 종교 법정과 독립하여 민간 법정이 있었던 것 같다.(Bovon, III/3, 190) 재판관은 도시에 살았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백(루카 16,8-)하고 있다. 재판관은 의롭고 경건했던 즈가리아(루카 1,74-75)와 정반대 인물이다. 누구나 거울 앞에서 양심 앞에서 혼잣말로 고백할 때가 있다. 루카복음에서 혼잣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루카 12,17; 16,3; 18,4) 3절에서 억울한 일이 무엇인지 루카는 설명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도 루카는 말하지 않았다. 6-8절에서 예수는 멋진 이야기꾼, 자신 있는 설교자, 속 깊은 성서학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부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대명사다.(루카 7,12; 21,3)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자녀도 없었던 것 같다. 홀몸으로 사회에서 크게 소외된 처지다. 과부는 노숙자 아니었을까. 가장 악질인 재판관과 가장 가난한 과부가 한판 승부를 벌인다. 누가 이길까.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편애하는 해방신학자 루카는 당연히 과부 편을 든다. 과부에게서 놀라운 점 두 가지가 있다. 과부는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달려갔다. 몇 차례나 갔는지 자세히 소개되진 않았다. 또한 과부는 재판관에게 무릎 꿇지 않고 당당하게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 과부의 용기가 놀랍다. 저항하는 여성신학자 같다. 세월호 희생자 어머니들이 청와대 앞까지 가고 법원에 공정한 판결을 호소하는 장면과 겹친다. 억울함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기도다. 


▲ 지난해 11월 16일, 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가 참사 당일 박근혜의 7시간 행적을 밝히기 위한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곽찬


악한 사람을 설득시키는 방법이 있다. 끈질기게 조르는 것이다.(루카 11,2)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려움metus이 아니라 희망spes이다.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으로 외쳤다. 희망을 가지고 끈질기게 간청하면 악한 사람도 결국 감동받을 수 있다. 착한 사람이야 금방 설득될 것이다. 하느님이야 더 말해 무엇인가. 우리가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데 게으를 뿐,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데 몹시 서두르신다. 


착한 재판관이 아니라 왜 악한 재판관을 예수는 비유에 소개했을까. 착한 재판관에서 자비로운 하느님을 연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예수는 몇 가지를 말하고 싶었다. 1. 악한 재판관을 설득시키는 방법도 있다. 나쁜 의도에서 선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악한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대로 결국 판결했을 것이다. 2. 불의는 청산되어야 한다. 3. 당시 법조인중에 부패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예수는 법원 개혁을 간접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4.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을 외면하지 말라. 한국의 검찰개혁, 법원 개혁을 예수는 충분히 이해하고 찬성할 것이다. 주교들은 대구 희망원 사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는 구름을 뚫고 올라 하늘에 닿는다. 


기도에 대한 예수의 특징을 살펴보자. 1. 예수도 기도했다. 삶의 결정적인 고비마다 예수는 기도했다.(루카 3,21; 5,16; 11,1) 2. 예수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권고한다.(루카 21,36; 22,40; 테살로니카전서 5,17) 우리는 기도의 매력과 위력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기도를 소홀히 하기 쉽다.(에페소 3,13; 테살로니카후서 3,13) 세상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기도에서 멀어지기 쉽다.(루카 8,14; 18,8; 24,21) 기도는 도피가 아니라 저항이다. 기도는 저항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다. 불의한 세력과 지치지 않고 싸우려면 기도가 꼭 필요하다. 해방신학자들은 끈질기게 기도한다. 


본문에서 두 번째 이야기가 나온다. 루카 18,1, 19,11처럼 루카는 이야기의 목적을 첫 문장에서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10절에서 두 사람이 같은 의도로 같은 장소에 동시에 갔다. 대조적인 두 모습(루카 15,11-32; 16, 19-31)이 소개되고 있다. 대조법은 루카가 즐겨 쓰는 서술 기법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당당하게 서서 큰소리로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며 기도했다. 독백으로 조용히 기도했다면, 루카가 기도 내용을 기록할 수 없겠다. 조용히 기도하는 것은 당시 드물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가톨릭 고백성사에서 고해하는 신자가 다른 사람의 죄를 고발하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루카는 바리사이의 기도를 먼저 보도하고 있다. 바리사이가 세리보다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리사이가 이야기에서 패자이기 때문이다. 루카는 패자를 먼저 배려하는 것이다. 11-12절 바리사이의 기도가 정통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전형적인 기도인지, 아니면 어떤 바리사이파 개인의 기도를 묘사한 것인지 논의가 있었다. 본문 어디에도 전형적인 바리사이들의 기도라는 단어도 암시도 없다. 마찬가지로 세리의 기도도 전형적인 세리들의 기도는 아니다. 그저 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한 세리의 기도가 소개되고 비교되었을 뿐이다. 

 

바리사이는 세 가지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기도했다.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그런 죄를 짓고 산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일주에 두 번 단식은 유다교 규정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유다교는 화해의 날에만 단식 의무가 있다.(레위16,29-; 23,27-) 바리사이는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단식한 것 같다. 11절에서 모든 수입은 소득뿐 아니라 구입한 물건도 포함된다.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는 자랑은 할 필요 없었다. 십일조 의무(레위기 27,30; 민수기 18,21-24;신명기 14,22-)를 크게 넘어선 일이다. 산 물품에 십일조를 낸 것은 물건 구입에 이르는 여러 과정에서 십일조를 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시선을 아래로 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세리가 죄의 용서를 청한 것은 아니다. 그럴 용기조차 없을 정도로 움츠려 들었다는 뜻이겠다. 가슴을 치는 것은 속죄의 자세다.(시편 51,3)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하느님과 당당하게 마주 설 수 잇는 사람이 취하는 자세다.(이사야 38,14; 시편 123,1; 요한 11,41)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입니다.”(에제키엘 21,31; 루카14,11) 


▲ ⓒ 최진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오늘 한국에서 누구일까. 사회 안에서 돈이 없거나 배운 것이 적어서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 안에 신앙심이 약한 듯 보여서 외면당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로마서 14-15장; 고린토전서 8,7-13)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부자를 숭배하는 것도 잘못이다. 부자를 숭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다. 


모든 재판관을 나쁜 재판관으로 일반화할 필요는 없다. 모든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면 안 된다. 사람들을 신자들을 바리사이와 세리로 나눌 필요는 없다. 한 사람 안에 바리사이와 세리의 모습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 내 안에 교회 안에 바리사이와 세리가 함께 있다. 복음서에서 일반화의 위험은 비유나 이야기 곳곳에 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이분법과 과장법을 즐겨 쓰긴 했다. 그렇지만, 예수를 생각이 편협한 사람으로 여기면 안 된다. 이분법과 과장법 자체를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도 없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기도하는 신학자였다. 박해받는 신학자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편애하는 해방신학자였다. 신학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신학자다. 기도하지 않으면, 박해받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편애하지 않으면, 아직 신학자는 아니다. 아직 성서학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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