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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82 : 가난과 예수 따르기
  • 김근수
  • 등록 2017-08-08 13: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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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람들이 어린 아기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16 예수께서는 어린 아기들을 가까이 오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17 잘 들으시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18 유다의 지도자 한 사람이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고 예수께 물었다. 19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20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21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저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켜왔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22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당신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셨다. 23 그러나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무척 마음이 괴로웠다.


24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26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7 예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셨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가정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9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30 누구나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18,15-30) 




열 명의 나병환자(루카 17,12-19) 이야기처럼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루카 18, 1-14) 시간을 불쑥 끼어들어 방해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에게 축복을 청한 사람들을 제자들은 왜 나무랐을까. 예수 말씀이 중단되는 일이 싫어서 그랬을까.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일에 예수 제자들이 짜증을 냈다는 말일까.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보다 못난 제자들이다. 어린이들이 예수에게 오는 것을 예수는 막지 말라고 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가오는 어린이들을 안고 이마에 키스를 아끼지 않는다. 


마르코 10,13-16에 근거한 이야기다. 초대 공동체에서 논의되었던 유아 세례와 관계가 있던 이야기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루카에게 유아세례가 중요한 주제였을까. 내 생각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중요한 주제였다면, 루카는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을 것이다. 마르코에서 어린이paidia를 루카는 왜 갓난 아이brepe로 고쳤을까. 어린이보다 더 힘이 약한 갓난아이를 사람들에게 존중하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이다. 


15절 손을 얹어는 손으로 만지다는 뜻이다. 만지다 동사는 루카복음서에서 아주 중요하다. 예수는 나인이라는 마을에서 과부 아들의 상여에 손을 대었다.(루카 7,14) 예수는 매매춘 여성이 당신 발에 손을 대게 내버려 두었다.(루카 7,39)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루카 8,44-47) 예수 몸에서 놀라운 기운dyunamis이 빠져나갔다.(루카 6,19; 8,46) 손과 몸의 신학이라고 할까. 프란치스코 교호아이 어린이를 안고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의사와 간호사, 소방관과 버스 기사의 손은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가. 우리들의 평범한 손이 사랑을 전하고 사람을 살린다.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일은 당시 흔했다. 당시 어린이는 약하고 가치가 적은 존재로 여겨졌다. 어린이들을 어른의 스승으로 제시한 사례는 고대에 드물다. 어린이는 순수하다기보다 미숙하게 여겨졌다. 어린이가 어른이 보고 배울 모범으로 존중되지는 않았다. 예수는 이 관행을 깨뜨렸다. 강력한 힘과 권력으로 신과 종교를 나타내는 일이 고대 종교들의 특징이었다. 예수는 어린이와 십자가라는 약함으로 종교를 표현하는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약한 분이시기도 하다. 복음서에서 어린이는 나이 어린 사람보다는 힘이 약하고 권리가 없고 신앙심이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대명사였다. 두 가지를 루카는 말하고 싶었다. 1. 하느님나라를 어린이들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받아들여라. 2. 어린이처럼 되어라. 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18-30은 마르코 10,17-31을 기초로 했다. 18절에서 유다 지도자arkon 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예수에게 물었다. Arkon은 야이로(루카 8,41)에게 쓴 말이다. 루카에서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는데 참여했다.(루카 23,13; 24,20) 회당장 또는 도시의 의회 의원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가 동네 유지였음은 틀림없다. 마태오 19,22에서 어떤 부자 청년이 같은 질문을 했었다. 유다 지도자는 왜 하느님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물었을까. 더구나 예수의 권위에 대해 캐묻거나 따지지도 않았다. 그는 예수 가르침에 벌써 매력을 느꼈다는 말인가. 그의 질문이 도전적인가 진심에서 나오는 질문인가.(루카 10,25) 알기 어렵다. 


20절에서 예수는 구약 십계명의 일부를 언급하고 있다. 그 순서는 토라(모세오경)에 나오는 십계명(탈출기 20,12-16; 신명기 5,16-20)을 순서와 조금 다르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자리가 뒤바뀌었다. 예수가 일부러 그랬을까. 간음이 살인보다 흔한 사회였다는 뜻인가. 예수는 십계명을 순서대로 외우지 못했는가. 어려서부터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다는 그는 충실하고 훌륭한 유다교 신자다. 지금 우리 중 누가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예수가 그를 대견해 했다는 말(마르코 10,17)은 루카에서 빠졌다. 예수가 요구하는 내용으로 곧장 건너가는 것이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이다. 22절에서 나누어주라diados는 말은 주라dos(마르코 10,21)는 말보다 더 구체적이다. 재산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요구다. 세상에.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마르코 10,22)는 루카에서 “무척 마음이 괴로웠다”로 바뀌었다. 유다의 지도자가 떠나갔다는 말은 없다.  


낙타는 이스라엘에서 보는 가장 큰 동물이다. 바늘귀는 일상생활에서 보는 가장 작은 구멍이다. 낙타는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다. 이 단호한 뜻을 약화시키면 안된다.(Kremer, 178) 



바늘귀는 예루살렘 성문 곁에 있는 작은 문을 가리킨다는 의견도 있었다. 낙타가 빠져나가기에 빠듯한 크기의 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주장을 근거 짓는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자는 구원받을 방법이 전혀 없는가. 없다. 아니, 하나 있다.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다. 하느님은 부자 마음을 돌이키실 수 있다. 부자들은 돈 욕심을 줄여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부자들은 들어라. 인생 겨우 백년이다. 돈이 하느님 같아 보여도, 돈 그거 아무 것도 아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함이 더 중요하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말을 예수는 부자 청년이 떠나간 후에 제자들에게 했다(마르코 10,24-25). 루카에서 예수는 그 말을 유다 지도자와 주위에 있던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언을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자들은 심각하게 들어라. 부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초대교회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예수 따르기에 돈이 얼마나 방해되는지 정직하게 깨달아야 한다. 예수 따르기에서 핵심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예수 따르기에서 핵심은 미사와 예배에 얼마나 자주 참여하느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어렵다는 뜻이겠다. 


사악하고 교활한 종교인들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바늘구멍을 넓히고 낙타를 줄이려고 갖은 잔꾀를 지어내왔다. 가난이란 단어 앞에 다른 단어를 추가하여 경제적 가난이라는 본래 뜻을 흐려버리는 기술도 있었다. 가난보다 마음의 가난, 영의 가난을 강조하는 수법도 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쉽다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그리스도교 역사에 끊임없이 나타났다. 부자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신학자로서 그렇게 비굴하게 살고 싶을까.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고 뻔뻔스럽게 거짓말하는 종교인도 있다.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종교인도 있다. 돈으로 귀신뿐 아니라 하느님도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부자들도 있다. 그런 가짜 신학자와 종교인과 신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8절 말처럼 베드로와 제자들은 정말로 가정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는가. 베드로는 선교에 아내를 동행하고 다녔다고 바오로는 말한 적 있다. “우리라고 해서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고린토전서 9,5)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집, 아내, 형제, 부모, 자녀를 버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 눈에 띈다. 마르코 복음에 비해 루카에서 땅이 빠지고 아내가 추가되었다. 그 이유는 알기 어렵다. 이혼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 집을 떠나 멀리 선교하러 가는 초대교회 풍경이 떠오른다. 그런데, 아내는 버린다 해도 자녀를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아내가 가출하면 찾아나서는 남편이 있을까. 아내도 자녀도 없던 예수라서 말을 심하게 하는 것일까. 예수가 진짜 한 말은 아니고, 초대교회 사정을 보고 루카가 덧붙인 문장이겠다.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예수가 강조했다고 이해하면 충분하다.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루카에서 덧붙여졌다. “현세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마르코 10,30)과 다르게 루카는 어떤 상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재산 포기의 목적은 마르코에서 예수와 복음(마르코 10,29)이었는데, 루카는 29절에서 하느님나라라고 강조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나라는 율법과 예언서(루카 16,16)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율법과 예언서를 더 확장하고 상승시킨다. 


하느님나라는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고 선언할 뿐 아니라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요청한다. 예수를 제대로 따르고 싶은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진지하게 고뇌해야 할 주제다. 돈이 아무리 하느님 같아 보여도, 돈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돈을 나누어야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온갖 종교적 계명과 의무를 다 지켰다 해도,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한다. 부자는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소유한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 한국 주교들은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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