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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84 : 예리고에서 소경 치유
  • 김근수
  • 등록 2017-08-22 13: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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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예수께서 예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나자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38 그 소경은 곧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39 앞서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소경이 가까이 오자 41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셨다.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그가 대답하자 42 예수께서는 “자, 눈을 뜨시오. 당신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43 그러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어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18, 35-43) 




예수의 세 번째 죽음 예고와 제자들의 이해하지 못한 충격에 이어 예리고의 시각장애인을 치유한 보도가 이어진다.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 이야기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 이야기다. 마르코 10,45-52를 루카는 대본으로 사용했다. 제자들은 마음의 눈이 안 보이고 예리고의 시각장애인은 몸의 눈이 안 보인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본문의 주제다. 단순한 병 고침 이야기가 아니겠다. 예수 일행은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있다. 루카 19,45에 이르러서야 여행은 끝난다. 예리고가 예루살렘 가까이 있음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루카 10,30) 


장소와 등장인물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훌쩍 건너뛰는 단락이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예수 행적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자세히 소개되진 않았었다. 루카는 본문부터 예수 일행의 동선을 자세히 밝힌다. 예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루카 18,35), 예리고에 이르러(루카 19,1),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루카 19,11), 올리브 산 중턱에 있는 벳파게와 베다니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루카 19,29),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루카 19,37),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루카 19,41),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루카 19,45). 독자들은 마치 예수 일행과 함께 움직인다는 느낌을 더 받을 것이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는 예리고를 떠날 때, 그러나 루카에서 도착하기 전에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을 만났다. 그는 앞이 안 보일 뿐 아니라 구걸하는 사람이다. 시각장애인, 거지, 가난한 사람, 세상에서 흔히 무시당하는 사람이다. 나면서부터 앞이 안 보였을까? 병이나 사고로 그렇게 되었을까? 마르코는 그 이름을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고 자세히 밝혔고(마르코 10,46), 마태오는 시각장애인 두 사람(마태오 20,30)이라고 했다. 루카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본문에서 치유자인 예수뿐 아니라 치유받은 시각장애인도 주인공이다.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예언자다.(이사야 61,1) 시각장애인이 치유받은 후 하느님 칭송과 감사기도를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소개되진 않았고, 예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예리고는 요르단강 분지 해수면 250미터 이하에 위치한 곳이다. 인간이 살았던 가장 낮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까지 25~3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예리고와 예루살렘은 높이에서 약 1,000미터나 크게 차이가 나지만, 순례객들이 하루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예리고는 공동년 66~70년에 있었던 유다독립전쟁 때 로마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로마총독이 겨울에 여기서 지내던 휴양지다.(루카 10,30) 순례자들에게는 예루살렘 도착 직전에 마지막으로 쉬어가던 곳이다. 


나자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은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 쓰던 표현과 같다.(탈출기 12,23; 마르코 6,48) 예수가 그냥 길을 지나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이 다가온다는 말이다. 다윗의 자손은 정치적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는 백성의 기대가 담겼다.(루카 1,32; 20,41.44) 전투를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오는 왕이 길에서 만난 백성을 위로하는 장면을 루카는 연상했을까. 시각장애인은 마치 전례에서 환호성을 지르듯이 예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질렀다.(루카 16,24; 17,13)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소리로 외치는 시각장애인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루카 11,5-8; 18,1-8) 


마르코 10,47에서 나자렛nazarenos 예수는 본문 37절에서 nazoraios(사도행전 2,22; 4,10; 26,9; 마태오 2,23; 요한 18,5)로 바뀌었다. 다른 곳에서 nazarenos가 쓰이기도 했다.(루카 4,34; 24,19)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자렛 예수는 어떤 뜻일까. 성서학자들의 생각은 다양하다.(Wolter, 608) 1. 나자렛이란 지명. 2. 나지르인 서약.(민수기 6,2; 신명기 33,16; 판관기 13,5) 3. 새싹.(이사야 11,1; 요한묵시록 22,16) 4. 보존하다, 지키다(시편 119,22) 율법을 보존하는 사람(예레미아 31,6) 그중 어떤 설명도 제외할 수 없고 어떤 하나로 결정할 수도 없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왜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했을까. 제자들도 여러 군데에서 그런 잘못된 처신을 보였다. 예수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막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인가.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에게 오지 못하도록 행동으로 방해하는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있다. 예수에게 간청하는 사람들의 간절함을 높이려는 문학적 기법에서 복음서 저자들이 그런 대목을 일부러 지어내 썼을까. 예수는 걸음을 멈추고 시각장애인을 데려오라고 일렀다. 해외 방문중 예정에 없이 다가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반기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이 떠오른다. 믿음이 당신을 살렸다(루카 7,50; 8,48; 17,19)는 말은 예수에 대한 신뢰가 그리스도교 믿음의 기초임을 알려주고 있다. 예수에게 하소연하는 울부짖음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시각장애인이 성서를 읽었겠는가. 



루카는 대본으로 참고했던 마르코 8,22-26과 달리 어떻게 치유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치유받은 시각장애인은 예수를 따랐다. 제자가 된 것이다. 12제자만 예수의 제자인 것이 아니다. 예수가 뽑은 제자가 있었고, 자발적으로 예수를 따른 제자도 있다. 치유를 지켜본 군중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군중이 고맙다. 군중을 무지하다고 여기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정치인, 지식인, 종교인도 있다.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군중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예수의 놀라운 특징이었다. 촛불집회의 군중을 기억하자.


예리고의 시각장애인처럼 끈질기게 매달리고 간청하는 사람은 눈을 뜨고,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고, 예수를 따르게 된다.(루카 24,16. 45; 사도행전 9,17-) 시각장애인의 외침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예수 기도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지고 사랑받았다.(Kremer, 181) 독자들은 이 시각장애인처럼 예수에게 의지하고 따르면 된다. 우리들은 예리고의 시각장애인에게 배우면 좋다. 눈을 뜬 시각장애인은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군중이 하느님 백성laos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두 질문에 마주 한다. 1.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루카 3,10-) 인간이 신에게 하는 질문이다. 2.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루카 18,41) 신이 인간에게 하는 질문이다. 예리고의 시각장애인처럼 나는 이렇게 겸손하고 진지하게 말하고 싶다. 인간의 최종 답변은 무엇일까.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루카 18,41)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역사 현실을, 예수 삶과 죽음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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